내가 꿈꾸는 학교
남들이 자식을 위해 떠난다는 교육 이민 이야기가 넘쳐나기 시작할 때 나는 두 딸을 데리고 내 나라로 들어왔다. 4년 넘은 해외 생활을 접고.
무슨 특별한 철학이 있어서나 '유별난 애국심' 때문은 아니다.
자녀는 그 부모의 밑에서 자라는 것이 맞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공인으로서 살아야하는 목회자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귀국 결정은 나와 아내만 해서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아이들을 설득하고 그들의 동의를 받아내야 했다.
이미 아이들은 영국의 생활에 넉넉히 젖어들어 있었다.
11학년이었던 큰 아이는 챰돈이라는 인도 출신 아이와 밤낮으로 어울려 다니고 있었다. 기왕이면 하얗게 생긴 영국 토산(?) 아이들과 가까이 사귀라고 눈짓을 해도 어쩐 일인지 밤 굴러가는 식의 발음을 조잘대는 그 아이와 늘상 붙어 다니고 있었다.
10학년인 작은아이는 자기의 활달한 성격답게, 또래의 영국 아이들을 몰고 다니며 '십대의 날들'을 즐기고 있었다. 걸핏하면 친구 생일 파티에 가기 위해 선물비 내놓으라고 제 어미와 입씨름하기 일쑤였다.
방과 후 집에 돌아오면 두 아이는 자기네끼리 영어로 떠들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였다.
이 모양을 대견스레 바라보는 것도 잠시, 부모 된 우리는 어느새 이국 땅에서 소외감 같은 걸 느끼기 시작했다. ... 이미 두 딸아이는 이 나라의 사회와 환경에 길들여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큰 아이는 '범생'으로서 수학 경시대회나 무슨 공작 대회 같은데서 상장을 계속 받아왔다. 그와 달리, 작은아이는 학교 써클 모임이나 음악제 등 과외 활동에 더 열심을 냈다.
어느 해 가을에 열린 타일 힐 여학교의 가을 축제에서 큰 아이는 합창반 반주를 맡았고, 작은아이는 드라마에서 조연-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큰딸의 역할-을 맡아 멋진 연기를 해 내었다.
그러던 그들을 앞에 앉혀놓고 귀국 얘기를 처음 꺼낸 것은 해외 체류 4년이 지척인 시기였다. 아이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동네와 친구들과 학교를 다 떨쳐버리고 새로운 환경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 진정 그들은 다가오는 환경의 변화가 장차 자신들에게 무엇을 강요할 지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빠, 그래도 여기가 편한데...' 그저 말끝을 흐리는 정도로 첫 얘기는 끝났다.
나의 귀국은 어렵사리 결정된 상태였고, 그 일을 미룰 입장은 아니었다. 귀국 일정은 진행되었고 나와 아내는 몇 개월 먼저 짐을 정리했다. 아이들은 학기를 마저 마치고 오도록 친숙한 학교 써클 언니인 셸리 집에 맡기기로 했다.
아이들을 남겨두고 귀국하던 날, 공항은 해외 이민자들로 붐비고 더 나은 학교교육을 향해 엄마의 손에 매달려 비행기를 타는 조기 유학의 행렬이 줄을 잇고 있었다.
사실 우리는 잉글랜드의 동네에서도 초등학교 4학년 아들과 함께 들어 온 한 어머니의 정착과정을 돌봐준 적이 있었다. 모 은행의 간부라는 남편은 반 년 후 쯤에 다니러 왔다. 거기서는 아들과 엄마가 살고 한국에는 딸과 아빠가 사는... 철저한 이산가족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와 아내는 '저건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유학이든 이민이든 남의 나라에 맨 먼저 도착하면 풀어야할 3대 과제가 있다.
살 집을 구비하는 일, 적당한 차를 사는 일, 그리고 자녀의 학교 문제해결.
나는 잉글랜드 중부의 한 지방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무작정 아이들을 데리고 가장 가까운 학교를 찾아 나섰다. 우선 초등학교 5학년을 막 올라선 작은 아이의 손목을 잡고 집에서 몇분 도보 거리의 초등학교(Primary school)로 갔다. 콘크리트 교사와 즐비한 교실은 거기에 없었다. 그것은 내가 연상하고 있던 학교가 아니었다. 적어도 100여년은 족히 됐음직한 아담한 석조 본관 건물과 거기 달아 지은 작은 교사 3동이 있을 뿐이었다. 그 규모의 아담함... 마치 소규모의 수도원 같은 느낌이랄까.
교장실로 안내를 받아 들어갔다. 키가 커서 구부정한 교장 선생님은 연신 웃는 표정으로 낯선 동양인을 맞이했다. 한쪽 무릎을 낡은 카펫트에 꿇은 채 능숙하게 커피를 만드는 모습에서 우리는 긴장감을 벗어버리고 느긋함을 회복할 수 있었다.
영국 내 초등학교의 2/3가 100명에서 300명 정도 학생의 규모이며 교사 대 학생 비율은 22:1이라고 알려줬다.
우리 아이는 바로 다음 날부터 학교에 보내는 것으로 얘기됐다.
대화를 마치고 같이 복도를 걸어 나오는데 마침 휴식 시간이었다. 많은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복도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교장이 일일이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나누고 또 어떤 아이는 허리를 굽혀 끌어안아 주기도 하는 것.
어린 그 시절... 근엄하신 교장 선생님의 뒷모습만 쳐다보았던 우리. 우리에게는 그 광경이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다.
큰 아이는 한국에서 막 중1학년에 입학한 터였기에 중등학교(Secondary school)를 넣기로 했다.
마침 동네 위쪽으로 초등학교와 비슷한 거리에 탑튼 스쿨이 있었다. 이 학교는 남녀공학으로 제법 큰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교복 색깔은 좀 칙칙한 편이었다.
담당 교직원은 이런저런 설명을 덧 붙였다. 영국의 경우 중등학교는 초등학교와 달리 규모를 가지고 있으며 보통 600-1000명의 학생이 수학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도 교사와 학생 비율은 1:15.4 정도라고. 영국의 교육은 국민에 대한 국가의 서비스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리고 의무교육이라는 개념이 1870년 이후 도입 시행되고 있다고 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자기가 먹는 점심밥 - 그것도 적지 않은 아이들이 학교로부터 쿠폰을 받아 먹는다 - 외에는 일체 돈이 들지 않는 다는 사실이 내게는 생소한 것이었다(사립학교는 비싼 등록금을 받고 있다). 심지어 아이들은 교과서와 노트까지 지급 받았다.
그렇게 해서 정착 과정의 가장 중요한 학교 문제가 매듭지어졌다.
그런데 두 아이를 학교에 넣고 난 후 여운으로 남았던 느낌은 그 절차가 너무도 단순하다는 사실. 학교에 찾아가서 아이의 이름과 생년월일 주소를 적는 것이 전부였다. 잔뜩 들고 간 서류-한국의 학교에서 만들어준 것 등- 를 들고 주춤거리는 나에게 그들은 됐다고 손짓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본래는 그 도시의 시 교육부에 들어가 한 장의 서류를 작성하고 상담을 해야 하며 그러면 행정처리가 되어 며칠 후 근처 해당 학교에서 학생의 집으로 연락을 하게 되어 있는 것. 사전 지식이 없던 우리는 그냥 무턱대고 학교로 찾아간 것이다. 그럼에도 학교에서는 우리에게 ‘걱정 말라, 우리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아이를 학교로 보내라’고 안심을 시켜주었다. 피교육자를 위한 행정의 유연성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여하히 아이들이 생소한 환경 속에서 잘 견디어 주는가 하는 것이었다.
마치 외계인처럼 지내야할 아이들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큰 아이는 떠듬떠듬 중1 영어 교과서를 읽는 수준이었고, 작은 아이는 간신히 알파벳을 익힌 정도였다.
아내는 작은 아이를 교문 앞까지 데려다주고- 초등학생은 등하교 시 반드시 부모가 동행하도록 되어 있었다-는 차마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고 한참 섰다가 오곤 했다. 글은 고사하고 말도 통하지 않는 설디 설은 백인 아이들 틈에 내던져진 아이...... 화장실이나 제대로 찾아갈지, 눈 노란 아이들에게 구경 꺼리나 되지는 않는지....
그 날 이후, 아이들이 얼마나 힘들어 할까 하며 조심스레 딸들의 눈치를 살펴보곤 했다.
.....그런데 보라! 아침만 되면 주섬주섬 학교 갈 채비를 하는데 꺼려하는 기색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 가방이란 것에 들어가는 것은 노우트 서너권. 작은 아이는 그나마 빈 가방을 덜렁 덜렁 메고 다녔다. 모든 것이 학교에 다 있다는 것.
그런데 며칠 상간으로 학교 선생님의 메모 레터가 아이들 손에 쥐어져 오곤 했다. 댁의 아이가 잘하고 있으니 염려 말라는 ...
거기서 그렇게 반년을 지낸 뒤, 우리 가족은 남쪽으로 한 시간 거리의 보다 더 작은 소도시로 이사를 했다. 이제 영국 생활의 어느 정도의 경험을 살려 다닐만한 학교를 미리 알아보고는 그 근처에 셋집을 결정했다. 당일로 그곳 시교육부에 들러 신고를 마쳤다. 이전의 학교에서 만들어준 간단한 서류를 들고.
이제 아이들은 집에서 도보로 3분 거리의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사실 학교와 집은 한 골목 안에 있었다.
그곳 타일 힐 학교는 학생 수 약1200명 정도의 여학교였다. 영국의 학교로는 제법 큰 규모의 학교로 넓은 면적의 테니스장이 있었고 실내 수영장도 구비하고 있었다.
나 역시 한국에서 여학교에 수년간 근무한 적이 있었기에, 이 학교의 분위기가 많이도 흡사하여 느긋한 마음이 들었다. 생일이 빠른 작은 아이는 이제는 등반하여 언니와 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아이들은 이전 학교에서 습득한 생존의 노하우를 살리며 자신만만하게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살펴보니, 아이들은 1년을 넘어서며 언어에 적응해가다가 2년 차에는 말하고 듣고 쓰는 일에 부담이 없어졌다.
둘 다 매일 3시 반이면 집으로 돌아왔다. 저들의 너무 여유스런 모습에 아내는 걱정이 났다. '너희 또래의 한국 아이들은 얼마나 고생할 텐데...너희는 이렇게 놀아도 되는지 모르겠다...'.
저들의 학제는 1년을 3학기로 나누고 각 학기 중에 중간 방학(Half-term)이 있었다. 물론 금요일 오후부터는 해방을 누리고 토요일과 일요일은 집에서 쉬었다. 종종 뱅크 홀러데이에도 학교를 가지 않았다. 공립학교 학생들의 경우에는 거의 공부에 대한 부담이 없는 것.
그러면 누가 대학에 가는가? 전체 학교의 93%가 공립학교이고 7%가 사립학교인데 사립학교 출신이 전체 대학 진학생의 65%를 차지한다! 사실 대부분의 공립학교 학생들은 대학을 진학하기를 원치 않는다. 안정될 대로 안정된 사회 분위기가 그런 결과를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전국 5000여개 이상의 소규모 사립학교들에 다니는 아이들- 그들 소수는 일찍이 철저하게 훈련됨으로 전체 영국 사회를 이끌어 가고 있는 셈이었다.
우리 아이들은 처음부터 공립학교를 다녔으므로 영국의 다수의 아이들과 '여유 만만한' 날들을 보내게 된 셈이었다. 그러니 조금만 노력하면 그들 틈에서 당연히 탁월한 점수를 받아올 수밖에.
특이한 것은 아이들이 받아오는 학년말 평가서였다. 각 과목별로 성취도가 평가되는데 학과 담임의 평가난이 있고 그 밑에는 학년주임의 난이 있다. 그런데... 그 평가 내용이 얼마나 자상하고 방대한지... 결코 피상적인 점수 매기기는 아니었다.
매 학기마다 '부모와 함께 하는 저녁'(Parent's evening) 행사가 있었다. 그 며칠 전에 아이들에게 시간 약속 통지를 미리 보내고, 당일 저녁에 아이와 함께 학교에 가는 것.
커다란 체육관이나 홀들을 개방하고는 각 선생님들이 벽을 뒤로하고는 둘러 앉게되고 학생과 학부모는 해당 시간에 약속된 선생님 앞에 가서 앉게된다. 각 선생님과의 대화 소요 시간은 5-7분 정도. 아이의 학교생활에 대한 얘기, 학과목 성취도에 관한 얘기들이 이어지며 그 큰 홀은 대화 소리와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무슨 음료수라도 들고 가려 해도 그 자체가 어색한 일이다. 나와 아내는 딸을 잘 둔 덕분(?)에 선생님들과 많은 칭찬과 덕담을 나누며 간간이 한국 얘기도 곁들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경직되지 않은 교사나 교직원들은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편안함을 주고 있었다. 큰 아이의 음악 선생님은 우리 아이의 재질을 소중히 여겼다. 우리 집에 피아노를 드려놓을 형편이 아닌 것을 알고는 여름 방학 동안 학교 피아노를 집으로 가져다 연습하도록 배려해주었다. 물론 음악 선생의 전권으로 이 일이 시행되었다.
한번은 네 식구가 함께 유럽 여행을 나가게 되었다. 이것보다 가치 있는 교육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 그런데 공교롭게도 날짜가 학기 중의 몇 날과 중복되었다. 그러나 염려 할 것은 없었다. 부모와 여행한다는 레터 한 장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저들에게 있어 아이의 교육의 최종 책임자는 학교가 아니라 부모였다.
이런 모든 제도는 신뢰와 정직이라는 사회 기본 개념 위에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4년 반이 지났고 아이들은 각각 10학년과 11학년을 마치고 귀국했다.
서울시 교육청에 신고를 하러 갔다. 당연히 밟을 절차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분위기는 그게 아니었다. 참으로 치밀하게 강요되는 온갖 서류들과, 취조관 같은 장학관의 눈길...
나중에야 알았지만 외국 체류를 위장하여 '특례'를 받으려는 속임수가 많이 있다는 것. 거짓과 부조리가 있고 또 그것을 색출하려는 고압적 자세가 있어야 하는 사회...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그 직후 큰 아이는 이 위대한 나라(?)의 대학을 가기 위해 학교와 동시에 학원을 다녀야 했다. 아침 7시에 집을 나서서 밤 11시 반에야 허덕이며 들어왔다. 걸어 다니며 졸았다.
당시 겨우 고1인 녀석도 정규 수업을 다한 후, '야자' 수업을 하고 나서야 밤 9시 반에 돌아온다. 더 이상 푸르른 날들은 저들에게 없었다.
혹시 바다 건너에서의 삶을... 잠시 꿈나라에 갔다가 온 것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곁눈으로 아이들의 표정을 살피는 아내와 나의 조심스런 모습이 수년 전 처음 남의 나라에 갔을 때의 그것보다 더 심각했다. ‘아, 저 아이들이 자라서 자신의 꿈대로 가르치는 이가 되어 교단에 섰을 때... 그때쯤은 교정에 아이들의 해말간 웃음이 피어날까?’
글 2000.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