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한명수 목사님
아 한명수 목사님
오늘 새벽...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고 한명수 목사님을 아쉬워한다.
그 분과의 첫 인연은 아내로 부터 시작됐다.
창훈대 교회를 개척하려
전쟁 미망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에 한명수 전도사가 들어오면서
아내는 그 개척 교회의 멤버가 되었다.
심방을 다녀오던 한 전도사는
당시 막 중학생이던 아내의 집에 들르곤 하였다.
마루에 걸터 앉아 엄마가 내다주는 동치미국을 호기있게 마시곤했다.
주일성수 문제로 부터 시작하여
참 고지식하게 강하게 가르치던 한 전도사는
그 인근 미망인들의 남편이요 고아와 같던 아이들의 아버지였다.
교회는 착실하게 자라갔다.
몇차례 건축이 진행되기도 했다.
그 견실한 목회 행진은 속깊은 사모님의 내조와 함께 만들어져갔다.
60즈음에 달겨든 위암 3기를 거뜬히 이기고
더 맹렬한 삶을 만들어갔다.
원자력 병원 주치의의 성공 샘플로 제시되어질 만큼...
십수년간의 기독신문 주필 생활,
엄청난 양의 저술들,
총회장으로 예장을 섬긴 큰 발자욱,
밀알재단 등의 장애인과 약자들에 대한 애정의 섬김....
무엇보다 그분은 내게 있어 빚이다.
목사 이진우를 많이 아끼셨다.
분에 겨운 일이다. 나는 늘 그의 곁에 있으면 눌린 마음으로 힘들기만 했는데....
나의 온가족이 해외로 나갈때 이른 새벽 공항으로 나오셨다.
훗날 런던에 들르셔서 정겨운 만남을 갖기도 했다.
돌아올 날을 묻기도 하셨다....
홀로 수원의 댁에 들르면 잠을 자고 와야 되었고
우리 아이들은 사랑의 용돈을 받으며 자랐다.
아, 금년 초
우리 딸애의 혼인 소식을 듣고는 '내가 가야지..'
그래서 축도 순서를 잡았다.
그러나 전날 저녁 부터 악화되어...끝내 못오셨다.
며칠후 병원으로 찾아간 나에게 '미안해 용서해줘...' '기도해줘...'
그의 야윈손을 잡고 기도드렸다.
그게 따스한 그의 손을 잡은 마지막이었다.
결혼을 앞두고 찾아간 딸아이 커플에 축복기도
당당한 평생에 비해
은퇴 이후 노년에는 엉뚱한 어려움....을 만나기도 했다.
그런 시간 속에 처해진 일...
이에 대한... 남모르는 아픔이
나와 아내에게는 있다.
봄이 된 지금 생각한다.
수년전 그와 함께 했던 3.1절 금강산 여행길...
그때 그의 얼굴에는 생기가 돋아 마치 고향에 돌아온 소년 같았다.
그는 분명 '의식이 뚜렷한...남북 분단의 상황을 늘 가슴앓이 하던... 민족의 어른'이기도 했다.
바람 많이 부는 날...
평생을 다 바쳐 사랑한 그의 창훈대 교회 마당을 빠져 나왔다.
그의 빈소에는
그를 사랑했던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장례식장으로 준비된 창훈대교회 본당
한명수(사진) 예장 합동 전 총회장이 췌장암으로 25일 새벽 수원 호스피스 기독병원에서 소천 했다. 향년 80세.
한 목사는 1932년 황해도 연백에서 출생했으며, 64년 수원 창훈대교회를 개척한 후 85~99년 예장 합동 교단신문인 ‘기독신문’ 주필을 역임했다. 그는 보수교단에 소속된 목회자였지만 목회자 납세문제나 교계 지도자들의 색깔론, 국가보안법 폐지, 통일문제 등 교회와 사회 이슈 전반에 대해 잘잘못을 과감하게 지적하며 보수교회의 ‘터줏대감’ 역할을 해왔다. 평소 후배 목회자들에게 배타적 사고를 버리고 실력과 정직, 청빈한 삶을 살 것을 강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 목사는 한국교회 역사상 제비뽑기로 선출된 최초의 총회장이다. 2002년 예장 합동 제87회 총회장을 역임하고 총신대 운영이사와 재단이사를 역임하는 등 교단 정치의 ‘1번지’로 불리며 교권의 핵심에 있었지만 교권주의자로 군림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초대 총무, 2001년 한국찬송가공회 대표회장, 2003년 부활절연합예배 대회장 등을 역임하며 교계 연합사업에도 두각을 나타냈었다. 2001년부터 10년간 백범정신실천겨레연합회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저서로는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잊지 못할 사람들’ 등이 있다.
유족으로는 황연숙 사모와 3남1녀가 있다. 발인예배는 28일 창훈대교회에서 드려지며, 경기도 이천 국립호국원에 안장될 예정이다(031-257-1001).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