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열매를 따먹지 못할 때
부모님이 많이 기도하셨는데...
결국 교회당이 매매되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큰누님은 탄식을 했다.
아침마다 두 분이 드리는 새벽 예배에서 매형은 울음을 터뜨리셨다고 한다.
(낙향하여 외진곳에 거주)
형제들 간에도 안 좋은 소식 전함은 가급적 자제함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내왔다. 그러나 어머니 같이 보듬는 큰 누님에게 만은 때로 들러서 마음을 나누곤 했다.
평생을 한 교회에서 관리직 일을 해 온 매형과 그를 그림자 같이 보필한 누님. 두 분은 교회의 궂은일 못 볼꼴을 다 봐야 하는 그 일을 했음에도 여전히 교회에 대한 마음이 여전히 순전하다.
‘동생 목사님은 잘 될 거야...’
늘 그러한 위로와 격려를 빼놓지 않았다.
그럼에도- 근자에 이르기까지 수년간 계속돼 온 나의 목회의 소용돌이는 누님의 큰 근심이 되었다.
그러다가 근자에 급기야 동생 목사가 위 수술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 마음에 체증 같은 신음을 토했다.
‘부모님이 기도 많이 하셨는데...’
우리 형제들에게는 남다른 부모님이 계셨다.
평생을 농부로 지냈지만 어느 전문 목회자 못지않은 교회 일을 해내셨다.
그들은 농사 짓는 일손 사이로 교회를 일구셨다.
그렇게 3개의 교회가 부모님의 희생 가운데 세워졌다.
개척을 하여 교인들을 전도하여 모우고 목회를 하다가는 담임 교역자를 모시고 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노년에는 본 교회로 돌아와 원로 장로로 지내시다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주목할 대목은,
부친은 일생의 숱한 밤을 교회에서 홀로 지내었다는 점이다. 당신의 기도자리를 마련하고는 교회를 지켰고 기도의 불을 이어갔다.
아! 그것은 우리 형제들의 은근한 자랑이 되었다.
기도한 아버지 어머니, 그들의 자손인 우리... 추도예배 때마다 은밀히 확인하는 대목이었다. 그 높이 쌓아올린 기도의 공덕(!)이 어디로 가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그 가시적인 복이 잘 보이지를 않았다.
적어도 형제 중 유일하게 목회 길로 나선 이 셋째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기도의 은덕이 해당되지 않는 것 같았다. 적어도 이제까지는...
수년간 계속 목회적 어려움을 겪는 동생을 바라보며 누님은 형제들은 궁금해 했다.
‘부모님이 기도 많이 하셨는데..??’
때로 목사를 부친으로 두었던 목회자들의 간증을 듣는다. 선후배 동료들...
자신은 부친 목사님의 헌신의 열매를 따먹고 산다는 식의 간증을 보기도 하고 듣기도한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선대의 기도와 교회를 위한 희생의 은덕으로 오늘의 내가 있다는 식의...
그런 말을 들을 때 나는 움츠려 들곤 했다.
‘아 나는 열매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그 그늘에라도 머물 수 있다면...’
하늘에서 은혜의 폭포수가 쏟아진다 해도 누구든 그 그릇만큼 받을 뿐이라는 말을 기억한다.
부모님을 의심하겠는가.
하나님을 원망하겠는가.
주님 앞에 홀로 선다.
이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