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저마다의 삶

한 사람의 명과 암

johnleejw 2014. 1. 18. 16:56

 

한 사람의 명(明)과 암(暗)

 

다음은 누구에 관한 글일까?

 

한학을 공부해 25세에 과거에 급제한 수재였다. 서예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추사 김정희에게 필적한다는 평가를 들었다... 그는 영어로 의사소통할 수 있었고, 공문까지 작성할 수 있었지만, 일본어를 배우지는 못했다. 청일전쟁 이후에는 친일파가 주도한 정부에서 친러파와 연대해 '야당' 역할을 자임했다. ... 독립문 건립 때 가장 고액의 기부자가 그였다. 이설(異說)이 없지는 않지만, 지금 남아 있는 독립문의 현판 글씨가 그의 필적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조선에서는 드문 '마음이 발라 나라를 자기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사람'(독립신문 18971111일자)이라는 평가도 들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일본 손아귀에서 고종을 구출하기 위해 춘생문 사건, 아관파천을 주도했다... 조약 체결을 거부할 힘이 없다면, 더 나은 조건으로 체결될 수 있도록 협상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라는 것이 그의 일관된 정치적 신념이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정치적 신념에 따라 그는 을사늑약의 원안을 조정해 대한제국이 부강해지면 외교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조항을 넣었고, 한일합방조약의 원안을 변경해 황제를 공()이 아니라 왕()으로 대우받을 수 있도록 했다...‘.

 

 

어느 위인에 관한 서술일까?

바로 이완용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들어서 알던 이름... 이완용 앞에는 먼저 매국노가 자리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 자가 왜 이씨인가에 분노하던 때도 있었다.

 

 

근자에 한 신문의 칼럼에서 이완용에 대한 글을 보게 되었다.

나에게 각인된 선입관과는 상관없는 객관적 사실 서술이라고 판단되었다.

아! 그는 무식한 자, 그저 돈과 권세만 탐한 자는 아니었다. 적어도 평생 악한 짓만 지속한 악한 무리의 괴수는 아니었다.

 

풍랑의 구한말 시대를 살던 풍운의 정치인이었다.

나라를 챙기고 위하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자신의 이익이라는 저울질에서 실패한 자였다.

(오늘날 우리 주변의 정치인들은 더 나을까?)

 

그런 그를 후대에 사는 우리는 그저 돌팔매질 하는 사람들 틈에 설 뿐, 다른 생각을 해 볼 여지 조차도 없다.

그건 아니겠다.

한 사람의 생애에 왜 공과 실이 없겠는가.

한 인간의 삶에 왜 명과 암이 없겠는가.

 

어두운 그림자는 누구에게나 달라붙는다.

 

 

 

칼럼자는 이런 논리로 마감한다.

이완용의 오류는 조약 체결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팔아먹는 조약의 협상을 다른 사람이 아닌 그 자신이 주도했다는 것이다... 정치의 본질적 기능은 대화와 타협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협상에 끼어들어 더러운 이름을 만대에 전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군가는 결국 받아야 할 비난을 앞장서서 맞이한 외로운(?) 정치인일까...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