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leejw 2014. 4. 22. 11:30

      

 

우리는 부활의 증인이라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2: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2: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세상에는 두 그룹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과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앞을 유신론자라고 부르며 뒤를 무신론자라고도 합니다.

이 둘 사이에는 건너기 어려운 간극이 있습니다.

일반 종교들은 이 문제에 그리 예민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범신론적 입장이거나 실상은 다분히 다신론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유일신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창조주로서 모든 것의 근원이시요 지금도 간섭하시는 분이시오 역사를 그 일정한 방향으로 밀고 가시는 분이십니다.

 

무신론과 유신론의 충돌

 

, 생각해보십시오.

무신론자와 기독교인이 토론하면 누가 유리할 것 같습니까? 누가 더 합리적인 말을 할 것 같습니까?

얼핏 생각하면 무신론 쪽이 유리할 듯합니다. 저들이 더 합리적이요 이성적일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어차피 신앙이란 개인 체험의 영역이요 안 보이는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에 좀 맹목적적이지 않을까? 합리성에서 밀릴 것 아닌가 라고 짐작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보게되었습니다!

지금 세계에는 공공연하게 무신론자임을 내세우고 그것을 설파하고 책을 써내는 학자들이 재미를 보고 있습니다.

무신론자들은 그들만의 단체를 형성하기도 합니다.

 

저는 근자에 한 흥미로운 영상을 보았습니다.

무신론자 협회가 뽑은 무신론자 대표 히친스와 기독교 목사인 윌리엄 레인 크레이즈가 공개 토론을 벌이는 것이었습니다.

주제는- 하나님은 살아있는가?

그런데 그 토론은 거의 일방적 게임과도 같았습니다. 누가 우세했을까요? 누구 수세에 몰렸을까요?

토론시간은 약 1시간 40.. 정도로 짧지 않은 분량이지요. 아주 흥미진진했습니다.

 

크레이그 목사는 거침이 없고 확신에 찼고 논리적이었습니다.

히친스는 가끔씩 날리는 허풍으로 공감을 끌어내려 했습니다. 무신론자로서의 주장과 공격이 있었지만 논리가 빈약해보였습니다.

결국... 히친스가 마지막 변론을 포기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 밤에 강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다양했습니다.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회의론자들...

그런데 82%라는 압도적 수자가 크레이그 목사의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었다고 결론지으며 강당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불신자의 입장으로 참석했던 47명의 사람들이 강당을 나갈 때는 기독교인 되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 중 그 뒤로 계속해서 무신론자로 남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도 합니다.

 

사실인 부활

 

이 부활절 아침에 그 토론을 다시 상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해 토론하던 크레이즈 목사의 논증 항목 속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실이 제시되었기 때문입니다.

부활 사건은 그 자체로 논리적 합리적으로도 설명될 수 있는 사실이라는 점입니다.

그가 제시한 5가지 항목은 이렇습니다.

1. 우주론적 증명.

2. 목적론적 증명

3.도덕적 증명

4.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5.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

 

보다시피 그의 유신론 증명의 4번째 항목에 바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들어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토론 중 예수가 이 땅에 온 시기가 잘못된 것 아닌가 하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이 논쟁은 히친스가 먼저 터뜨렸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인간은 신의 창조물이 아니다, 진화된 것이다

오랜 시간과 실패 속에서 무작위와 변이의 조합, 자연선택에서 의해 오늘날 인간의 종이 된 것이다.

 

그러면서 제기한 것은, 인류의 출현이 약 10만 년 전이라고 할 때 98000년 동안 지켜 보다가 구세주는 2000년 전에야 나타났다. 왜 하나님이 그토록 오래 기다려야 했나? 시간 낭비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크레이즈 목사의 반론을 보시겠습니까?

구세주가 2000년 전에 나타난 이유는 시간이 아니라 세계의 인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구참조사무국(Population Reference Bureau)에 따르면 지금까지 지구상에 살았던 사람은 약 105억명 정도로 추정한다. 2%만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세계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바로 직전에 이 땅에 오셨다.

 

참 흥미롭지요.

많은 반기독교적인 사람들이, 혹은 기독교인 가운데서도 회의적 입장의 사람들이 넘어서지 못하는 그 점이 설명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 오시기 전의 사람들은 각자의 속에 주신 양심 법에 따라 판단을 받는다, 이스라엘의 경우는 율법에 의해 판단을 받을 것이다 등의 해답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단 2%만이 예수님 오시기 전에 태어난 인류라는 것입니다. 인류중 많은 숫자가 하나님의 실수로 버림받을 거라는 걱정은 안하셔도 된다는 점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때가 차자 이 땅 위에 오셨습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서 그는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의 탄생과 존재하심은 마치 나폴레옹이나 이순신 장군의 존재보다 더 확실합니다.

기독교는 무턱대고 믿으라가 아닙니다. 이성적 논리적 변증으로도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그날 크레이그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차분하게 설명해 내려갔습니다.

역사학자들이 동의하는 4가지 팩트를 근거와 함께 제시한 것입니다.

예수 부활에 대한 4사실을 다 충족시킬 수 있는가? 최고의 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사셨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덤에 묻히심

2. 무덤이 빈 채 발견

3. 다시 나타나심

4. 제자들의 믿음의 근원

 

그는 위 네가지 사실을 충분히 설득력 있게 설명해 내려갔습니다.

 

제 생각에, 그들 중 예수 부활의 가장 강력하고도 분명한 증거는 예수의 12제자들이 급변이라고 보았습니다.

저들은 본래 소극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갑자기 죽음을 불사할 정도로 변한 것은 부활사건의 목격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안식일(토요일) 대신에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게 된 이유도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그야말로 부활하심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외칩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 것이라”( 고전 15:14).

 

사람들의 변화

 

성도 여러분, 부활은 정말 있었을까요? 있었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 사실을 확신할수 있을까요?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개 예수의 제자들을 두 가지 방식으로 봅니다.

유령 이야기라면 무조건 믿어버리는 순진한 촌뜨기들, 아니면 자기네 종교를 퍼뜨리기 위해 당치도 않은 이야기를 꾸민 음모자들...

 

물론 성경 기록이 보여주는 그림은 이와 아주 다릅니다.

예수의 제자들이야말로 주가 부활하셨대 라는 얘기를 선뜻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들임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 제자는 회의적이다 못해 의심쟁이라는 별명을 후대에 남기고 말았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뭐 비슷비슷합니다.

여인들이 빈 무덤을 보고 돌아와 한 말을 선뜻 수용한 제자는 없었습니다. 직접 나타나신 주께서도 왜 그리 믿음이 없느냐고 꾸중해야했던 그들입니다.

그러요. 11제자들은 그저 아무얘기나 선뜻 믿는 순진한 촌뜨기는 분명 아니었습니다.

 

그 다음 음모 이론은 어떨까요?

만약 제자들이 빈틈없이 이야기를 날조하여 퍼뜨리려 한 것이라면 그건 실패였습니다. 그들 자신이 확신을 과시하기는 커녕 문 잠긴 방안에 꼭꼭 숨어있었습니다. 예수를 죽인 자들이 우리도 해꼬지 하면 어쩌나...?

마음이 오그라들어 예수의 시신을 매장하는 일도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잠적했던 자들입니다.

 

, 이런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그 제자들이 부활을 꾸미고 그걸 드러내는 척했다는 것은 납득이 안가는 이론입니다.

부활 사건은 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4개의 신문이 각각 보도 했고 기자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입니다. 고로 각 기사를 서로 대조하며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건에서 여인들이 그 부활의 첫 목격자라는 점도 특이한 것입니다.

그건 바로 그 사건이 누군가의 날조가 아니라는 반증입니다. 무슨 말인가?

1세기 당시 유대 법정에서는 여인의 증언은 증언으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말의 가치를 인정치 않았다는 것이지요.

고로 누군가가 만약 누군가가 부활 이야기를 꾸몄다면 더 그럴싸한 증인을 내세웠을 것 아닙니까? 베드로나 요한... 아니 공회원이었던 니고데모... 하필 무명의 여자들을 내세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었기에 그대로 기록된 것입니다.

 

맨 처음 빈 무덤 목격 장면도 그러합니다.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뭔가 불투명한 점들이 많습니다.

거기 나타난 흰 옷 입은 사람은 하나인가 둘인가?

왜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했을까?

첫 목격 당시 마리아는 누구와 함께 있었나?

이런 사실들이 다 선명하지를 않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꾸미는 날조라면 이런 기록을 놔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후에서라도 산뜻하게 고쳐놨을 것입니다.

 

부활에 관한 날조

 

그런데 당시 부활과 관련한 날조가 있긴 있었습니다.

이 날조는 예수의 무덤이 비었다는 당혹스런 사실을 덮으려던 권력자들이 주도한 것입니다. 저들은 자신들이 죽여버린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을 덮고자 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부활이 그저 날조였다면 소문뿐이었다면 저들은 그저 무덤을 열고 그 안의 시신을 보여주기만 하면 됩니다. 봐라 부활은 거짓이다 여기 시신이 잇다! 그러나 무덤문은 깨져버렸고 시체도 사라져버렸습니다. 병사들은 사색이 되어 달려왔습니다. 그러니 그 소문을 반박할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인들이 기쁨으로 달리는 동안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은 당국자들과 입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부활은 가짜라는 음모를 위해 각본을 짜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의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적을 현장에서 목격한 증인들입니다.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땅이 흔들리고 천사가 나타나자 벌벌 떨며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지요.

이 병사들이 오후 쯤 가서는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28:13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28:15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건 말이 안됩니다.

우리가 졸았었다니... 그 큰 돌문을 굴려내는 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잠을 잘 수 있었을까? 또 그렇게 깊은 잠에 있었다면 그 훔쳐간 자들이 누구들인지 어떻게 알아요?

여러분, 거짓말의 특징은 무엇인가? 결국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것입니다.

 

나타나심

 

여기서 짚어 볼 다른 것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약 12번 정도의 나타나셨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나타나심에는 일정한 룰이 있습니다. 먼데 있는 소수나 실내에 숨어 있는 이들에게만 나타나셨다는 점입니다. 즉 전부터 예수를 알고 있는 사람들 대상으로 나타남이 진행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로므로써 저들의 믿음은 더욱 단단해져갓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부활하신 주를 본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왜 더 자주 나타나시지 않았을까? 왜 그의 동료들에게만 나타나셨을까?

기왕 빌라도 총독 앞에 턱 나타나시고. 산헤드린 공회 앞에 나타나 간담을 서늘케 하셨으면 얼마나 시원할까?

 

그러나 잘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 별로 듬직하지 못한 제자들, 자신이 십자가에 죽게 되자 도망이나 친 자들을 계속 찾아오셨고 급기야 저들을 바꾸어 놓는데 성공했습니다.

단 며칠 후, 저들은 부활한 예수에 대한 사실을 선포하는 겁 없는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모진 박해가 예루살렘을 뒤덮을 때, 로마 천지에서 벌어질 때 이 제자들이 보여준 놀라운 행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야말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도자, 담대한 증인들... 그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신 분을 만났기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흥미로운 일은 역사를 살펴보면 예수 당시를 전후하여 백년 어간에 자칭 메시야라고 하는 사람이 적어도 15명은 되었다 합니다. 그들은 잠깐 반짝했다가 다 사라져 갔습니다. 추종자들도 다 없어져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주님께 대한 충성과 열정은 그가 가신 후에 더욱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들은 온 세상 각처로 선교사가 되어 떠나갔습니다. 각처에서 영광스런 순교의 잔을 마셨습니다.

여러분, 부활을 제자들이 꾸민 연극이라고 우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세상에 그저 짜고 벌인 연극을 위해 목숨을 내던질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복음서에 나오는 제자들과 사도행전에 나오는 제자들은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사람이 바뀐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만일 그가 갑자기 달라졌다면 분명히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다!

 

오래 전, 스코틀랜드의 호수 지방을 갔었습니다.

전설의 괴물 네스가 산다는 네스호입니다. 호수 물은 짙푸르다 못해 짙은 어둠이었습니다. 그 호수에 그 괴물이 산다는 것입니다. 호수가의 박물관에 들어가보니 괴물 네스가 출현 사진들이 있습니다. 또 그것을 본 사람들의 증언도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 중, 호수의 괴물을 탐색하러 들어갔던 잠수부가 물에서 나 온 후 갑자기 머리가 더 하얗게 세어버렸다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너무나 큰 공포스러운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1.

 

여러분 그 괴물은 있던 지 없던지 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예수 부활의 사건은 우리의 생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다 달라졌습니다. 오직 예수는 구세주시라 그는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셨다 그를 믿는 자는 다 부활한다 우리가 바로 그 증인이라!

이것이 저들의 선포의 주제였습니다.

특히 본문은 사도 베드로의 선포입니다. 들어보십시오.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2: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2: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살인자들 앞에서 너희가 죽인 그분이 바로 구세주요 다시 살아나셨느니라고 쏘아부치는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숨어 있지 않았습니다. 닫힌 문 뒤에서 떠는 자가 아니라 담대히 거리로 나가서 그리스도를 말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그러다가 감옥으로 갑니다.

도대체 그 주일 아침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의 꿈, 부활

 

아이들은 동화를 읽으며 자랍니다.

그런 동화들의 대부분 그 끄트머리가 행복으로 끝납니다.

어른들의 세계도 그렇지요. 드라마를 보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저 이야기가 행복으로 끝났으면 좋겠다. 저 비련의 주인공이 이기면 좋겠다.. 그러다가 만일 비극으로 끝나버리면 그 작가는 두고두고 욕을(!) 먹습니다.

 

맞습니다. 이게 인간의 깊은 염원입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은 힘든 삶을 살아도, 지금은 고통의 길을 가도, 지금은 눈물이 있지만... 그 끝은 아름답기를 원합니다.

그 마음을 하나님은 잘 아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백성들을 그런 복된 자리로 초대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영원한 죽음으로 끝장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딤전2:4). 그 하나님이 만드신 사건이 바로 부활입니다. 예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주셨고 수많은 열매들이 이제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매듭

 

지난 주간은 고난 주간이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성도들이 주님의 고난주간을 기억하며 지내는 한 주간이었습니다.

이 주간에 우리나라가 정지해버린 듯한 사고를 만났습니다. 그토록 큰 배 페리호가 전복했고 슬프게도 거기 탄 수학여행 가던 고등학생들이 대거 물속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안산 쪽의 많은 교회들은 너무도 당황하고 있고 온통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안산동산교회의 한 목사님은 눈물이 나서 아이들을 쳐다 볼 수도 없다고 마음을 전해왔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도 특새 기간 동안 내내 이 재난 위에 하나님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지난주일 설교를 되새김했습니다. 과연 고난이란 무엇인가?

죄로 오염된 이 땅에는 고난이 당연히 있다.... 그 고난의 불똥이 튀는데 우리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단 그 고난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깊은 의미를 갖는다. 즉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안산에 있는 자녀를 잃은 가정에게는 무슨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안산의 성도들은 정말 무거운 부활절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험한 세상을 일찍 떠나간 자녀들이 영화로운 주의 나라에 들어갔음을 믿기를 바랍니다. 궁극적으로 온 인류가 부활하는 그 영광스런 날에 재회하는 그 소망을 다시금 붙들기를 소원합니다. 이 슬픔을 극복하며 더 견고한 복음의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새소망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부활 사실이 당당한 역사적 사건이며 과학적 사실임을 확신합시다. 이 불신앙의 시대에 조금도 주눅들지 맙시다. 오히려 복음의 증거자가 됩니다. 우리 모든 인류에게는 예수 부활이 필요합니다. 그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 이 짧은 세상을 지나면서 부활의 날을 준비하고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는 삶을 살기로 주께 약속드리는 이 아침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사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