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위한 눈물
요즘 내내 그들 부부가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의 아내의 상태가 어떤지 문자로 안부를 물었다.
이튿날 답신이 왔다.
“어제는 **님 등등 문병을 왔기에 목사님 생각이 났습니다.
마침 오늘은 저의 60회 생일 환갑날.
아내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자신의 시신 기증에 관하여.
항암치료는 효과 없어 중단 결정하였고 호스피스 병동을 신청했습니다.
이번 달 넘기기 힘들거 같기도 하고...
기도해 주세요. 하나님나라로 인도 될 수 있도록“.
이 날 오후 조심스레 병 위문을 하고 왔다.
이런 곤고한 상태에서는 누가 찾아간다는 것도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역시, 아내는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한다고... 나는 그 마음을 안다.
더구나 약 처방과 수면이 반복되는 리듬인데 누가 오면 그게 깨어진다고 했다.
마취약에 쩔어 잠든 상태의 그녀. 그저 바라보며 병상을 붙들고 조용히 기도 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만이 최선을 도모하실 수 있는 분이다.
아내가 생과 사를 넘나드는 순간이 이어지는 지금, 무슨 말을 그에게 할 수 있을까.
아내 곁을 지키는 그는 몇 주 전 보다 확연히 흰머리가 늘었다.
6개 월 전 재발 직후로는 그래도 병원 인근에 방을 얻어놓고 통원 치료했다.
그러나 지난 한 달 전부터 상태가 악화되어 병원으로 들어온 뒤, 상황은 더 어두워졌다.
지금 아내는 물 한 모금도 못 넘긴다.
간밤에는 자신도 두 시간 밖에 못 잤다 한다.
통증이 고조될 때에는 5중으로 마취를 실시한다.
마취가 풀린 상태에서는 신음하는 일 외에는 모든 게 불가하다.
의식 없이 누워있는 아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실상은 죽은 거 예요..’
‘아내는 저보다 믿음이 좋아요. 그렇게 살아온 저 여자에게 왜 저런 일이 다가온 것일까요’
‘죽으면 누구누구에게 연락할까 했더니 친구 6명밖에 없대요. 그렇게 살아온 사람예요’
어느 누구도 남의 고난의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말의 사치이다.
고난을 포함한 생은 그 자체가 신비이다.
‘너무 힘들어해서...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어요’ 아내의 고통을 대신 할 수 없는 남편의 사랑의 신음이다.
‘제가 때로 짜증도 나고... 좀 지치네요. 이 17층 병실에서 내려다보면... 저렇게 줄지어 달리는 자동차들을 보면...그런 치열한 다툼의 세상이 차라리 그리워져요..’
살벌한 세상과 거리를 두려 일찍이 퇴직하고 귀향했던 그이다. 그렇기에 그의 고백이 더욱 가슴으로 다가온다.
‘아내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그와 손을 잡고 기도했다.
눈물이 그렁하다.
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아내와 남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했다.
무엇이 최선인지 이 어리석은 인간이 알 턱이 없다.
‘심 선생님...지금 잘하고 있어요. 휼륭해요. 기도할께요’
지금 이 순간에도 절박한 순간을 보낼 그들 부부를 생각한다.
아, 사라들이 지겨워하는 이 일상은 얼마나 소중한 순간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