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회 이야기
-이글을 페북에 올렸더니, 가까운 학형이 자신의 소장 사진을 덧붙혀주었다-
부흥회 이야기
어린 시절을 시골의 교회에서 자란 나에게는 부흥회의 추억이 선연하다.
부흥회는 시골교회들에게는 잔치였다.
그것도 지역 잔치라서 동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집의 담벼락에 광고지를 풀칠하여 붙였다. 청년들은 미리 인근 10리 20리 반경의 교회들을 방문하여 그 벽에 부흥회 포스터를 붙이기도 하였다. ...
그러면 교회들은 다른 교회에서 열리는 ‘심령대 부흥회’에 교역자를 필두로 하여 교인들이 대거 참석해주곤(?) 하였다.
나 역시 십리 길을 철길 따라 걸어서 어른들이 참여하는 부흥회에 따라가곤 하였다.
본 교회의 부흥회가 열리면, 비록 초등학생 중학생 시절이었지만 저녁집회는 필수요 새벽까지 참여하곤 하였다.
당시 부흥회 강사님들은 마치 천사 같아 보였다. 천사였다.
그분들은 한주 간 내내 교인들의 영웅이요 대화의 주제요 눈인사라도 나누려 서성거려지는 존재였다. 낮 밤 새벽 예배를 계속 말씀을 토하던 그들은 영성의 대가이기도 했다.
그러면 그 부흥사들의 사례비는 어떠했는가?
우선 가난한 시골교회의 경우에는 그나저나 돈이 없었다. 교인들의 한주간 내내 합한 헌금액이 그저 ‘새 성경찬송 한 벌’ 살 정도였다(부모님의 대화를 기억).
1960년대 부흥사들은 사례비가 없었다. 아니 사례비를 받지 않고 지역 교회들을 순회하는 분들이 많았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강사들은 점차 사례비를 받았고 그것의 십일조를 떼놓고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게 감사헌금을 좀 내고 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제 모든 부흥사들이 강사 사례비를 전부 챙겨가는 것이 규례처럼 되었다.
그것도 ‘상당액’이 되어서 웬만한 교회가 아니면 강사 사례비가 강사 초청 선택여부의 관문이 되었다.
근자의 10, 20년 전 즈음에 와서부터는 어떠한가.
오직 헌금 갹출을 위한 부흥회도 성행하게 되었다. 이때에는 전체 헌금 중 어떤 비율로 부흥사와 교회가 나누는가에 대해 3:7 4:6 5:5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사용되게 되었다.
요즘은 더 나아간다. 좀 유명세를 가진 부흥사는 일단 비서실을 통해서만 접촉이 가능하다. 날짜 일정 조정이 거기서 이루어진다. 그 때 교인 수는 얼마인지가 확인되고 사례비는 얼마? 등등이 미리 다 조정되어야 한다.
결국 - 가장 영성이 탁월해야할 전문 부흥사들이 가장 위험한 지경에 서있게 되었다.
인간적 모든 욕심을 초월해야할 저들이 온갖 조직을 만들고 너도나도 감투를 쓰고 신문에 얼굴을 자주자주 내미는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들로 비춰지게 되었다. 고액의 사례비와 고급 승용차를 누리는 특정그룹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부흥회의 당연히 내용조차도 바뀌게 되었다. 구원, 회개, 순결, 성령 충만 등이 아니라 위로, 형통, 치유, 회복 등에 쓸려가게 되었다. 물론 카타르시스를 동반한 개그는 필수 요소이다. 물론 모든 부흥회, 모든 부흥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주 흐름이 그러한 것은 사실이다.
부흥회와 부흥사의 변질의 역사는 퇴락하는 한국교회의 영성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