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9설교 전문- 당신은 그들 중 누구일까?
*영상의 문제로 인해 원문 올림
당신은 그들 중 누구일까?
왕하5:1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왕하5:2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왕하5:3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왕하5:4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의 주인께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하니
왕하5:5 아람 왕이 이르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하더라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왕하5:6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하였더라
왕하5:7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왕하5:8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왕하5: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왕하5: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왕하5: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왕하5:12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왕하5:13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왕하5: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요즘 날씨도 더운데 좀 시원한 말씀으로 성도들을 격려함이 좋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본문 내용은 시원한 물에 들어가는 것~~
보통 선지자하면 예레미야나 엘리야 등등이 먼저 생각납니다.
그러나 가장 많은 이적들을 행한 이는 엘리사입니다. 그것도 우리 서민들과 밀접한 생활형 이적들을 행한 이가 바로 엘리사 선지자이지요.
그 이적 이야기들 중에 또 흥미 진진한 것이 본문입니다. 때는 기원전 900여년 즈음.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북쪽에 있던 아람 나라입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아람(수리아)과 경계를 맞대고 있었습니다.
저는 본문을 보며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엘리사를 통한 그 기적이 있기까지, 거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것.
우선 장본인인 나아만 장군이 있습니다. 그 집의 어린 소녀, 당시 이스라엘의 왕 & 나아만의 종들.
그들 각각의 모습을 살펴보며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자신의 모습을 볼수 있다면, 큰 유익이 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아람도 다스리는 하나님
아람족은 '셈족'의 후예로서 유목 민족입니다. 그들은 B.C.13세기 경에 이스라엘 북쪽의 다메섹에 정착했습니다. 그들은 특별히 상업에 재능을 보여 각지를 돌아다니며 무역을 했습니다. 때문에 그 언어인 아람어가 후대에까지 일상언어로 통용됩니다. 상상이 되시나요? 예수님도 집에서는 아람어로 대화했다는 사실을.
그 아람 나라와 이스라엘은 싸우기도 하고 화평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기록된 사건은 양자 간의 평화 기간에 발생한 듯하구요.
그 나라에 나아만 장수가 있었습니다. 아람에서 군대 장관이라는 직책은 군대의 총지휘권을 가진 자입니다. 국방장관이지요. 그는 특히 왕의 신임을 받는 특별히 인정받는 자였습니다.
그 이유는, 나라가 큰 위기에 빠졌을 때 용맹을 떨친 장군이었기에. 나라를 구한 공신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성경 기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왕하5:1 ...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아람 나라가 다른 나라와 전쟁을 했는데, 여호와께서 나아만에게 힘을 주셔서 그가 나라를 구하게 하셨답니다. 그 전쟁에서 승리하게하신 거지요.
여러분! 우리가 눈여겨 구약을 보면 이런 깨달음을 종종 얻습니다.
아, 여호와 하나님은 단지 이스라엘 민족의 신이 아니시구나. 역사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돌아가지만 주변 나라들이 함께 어우러져 갑니다. 이집트 바빌론 페르샤... 이들은 다 세계사에서 공부하는 나라들입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국경 너머 아람 나라를 섭리하십니다. 무슨 뜻에서인지 나아만을 통해 나라가 승리를 얻었습니다.
장군 나아만은
자, 다시 나아만 장군의 얘기로 갑니다.
그는 그래서 왕의 신임을 받는 군대장관이었습니다. 명패만 달고 있는 장관이 아니라 실세라는 것입니다. 그는 아람 나라에서 명예와 권세. 뭐 부러울 것이 없는 2인자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왕하5:1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그러나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갑자기 썰렁합니다. 큰 용사면 뭐하고 장관이면 뭐해요. 명예가 있으면?
그는 사람들이 기피하는 나병환자였습니다. 그는 그래서 이리저리로 나병을 치료하기 위해 골몰했음이 분명합니다. 그 어려움을 온 집안의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나아만 장군에 대해 짚고 갈 것이 있습니다.
저는 그를 바라보며 다시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은 없어. 사람은 누구나 다 완전을 누릴수는 없다.
우리는 때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왜,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불공평하게 여러모로 차이가 나는가... 자신을 생각하며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불평하십니까?
남들은 건강한데, 나는 왜 신체가 건강하지 못하지??
남들은 머리가 좋은데, 나는 왜 머리가 안 돌아가지??
신체장애인으로 있는 분들은 더더욱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한번 해봅시다. 그 불편한 이들이 남에게 폭행이나 강도죄를 저지르는 일은 없습니다. 사실 신체가 건장한 사람이 그런 범죄를 저지릅니다.
자기 외모를 불평하는 이도 있습니다. 나는 이토록 평범하지? 그러나 평범한 외모 때문에 실족하거나 넘어질 확률이 줄어듭니다. 매력적 외모를 가지면 유혹도 많고 넘어지는 일이 많습니다. 옛 말에 ‘꼴값을 한다’는 말이 그래서 나옵니다.
머리가 둔하다고 슬퍼하지만 머리 둔한 사람은 사기 쳐서 교도소 갈 일이 없습니다. 그저 순수하게 살 가능성이 많지요~~,
가난을 생각해보세요. 그 가난함으로 인해서 더 심령이 가난할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부자들은 사실 아주 불리하지요. 그 재물로 인해 교만하고 쾌락에 빠질 기회가 다분합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참 어렵다 그러셨겠어요.
결국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모든 불리한 환경, 여건에 처한 사람은 영적으로는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그 나라에서 왕 다음의 권세와 명예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깊은 고뇌 속에 있습니다. 불치의 병을 안고 있습니다.
정말, 예부터 한가지 걱정 없는 집은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누구나 어렴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해도 그 안에 가보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 그래서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가진 자 누리는 자를 부러워하지 맙시다. 자신이 남에 비해 부족하다고 불평하지 맘시다.
주인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감사를 고백합시다. 주님은 매우 공평하십니다.
자, 남에게 다 얘기 못하는 고민 고통 가운데 있는 나아만, 이제 그가 어떻게 그 문제를 풀어 갈까요?
어린 소녀 종
그 나아만의 집에는 종들이 있고 그들 중에는 어린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소녀는 이스라엘에서 붙잡혀 온 아이입니다.
전에 아람과 이스라엘은 작은 싸움이 잦았고 그럴 때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온 것입니다.
그 가운데 이 이스라엘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고향과 떨어져 낯선 곳에 끌려와서 고생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소녀는 환경에 찌들려 낙망하거나 분노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믿음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어떻게 그것을 알수 있나요?
소녀는 이제 나아만 장군의 부인의 시종으로 지내면서 나아만 장군의 나병을 눈여겨 보았습니다. 그는 나아만 장군이 집에 돌아와 화려한 관복을 벗을 때, 마다 내쉬는 한숨소리를 들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곤궁한 처지에 있는 이가 자기 주위 사람의 고통을 눈여겨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내 코가 석자이기에... 그런데 이 소녀를 보십시오.
주인 마님에게 갑니다. 마님, 주인님께서 우리 이스라엘의 사마리아에 사시는 예언자를 찾아가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이 주인님의 나병을 고쳐주실 것입니다‘.
그녀는 믿음의 소녀였습니다! 비록 구체적 이름은 안 나오지만, 이 소녀를 주목하십시오. 이제 이 소녀로 인하여 놀라운 일이 전개됩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 한 소년을 연상시킵니다.
그 역시 이름은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내놓은 오병이어로 수만의 사람들은 다 허기짐을 면했습니다. 벳세다 들판의 잔치이지요.
구약에서는 이 한 소녀가 있습니다. 이방에 사로잡혀간 한 어린 소녀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알려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명성이 이방 땅에 전파되도록하셨습니다.
내가 비록 지금은 포로 신세이고 몸종이야. 그러나 나는 만군의 여호와를 섬기는 자요 그 백성 중의 하나야! 이 긍지입니다.
나아만 장군이라도 내가 믿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해. 그러면 그도 산다라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확신과 긍지가 필요하니다.
어이구 나는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어... 저 부유한 사람들, 지체높은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하겠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대로 공허합니다. 아프며 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는 복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불치의 병에 걸렸던 나아만에게는 소녀의 말이 복음입니다. 그를 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심령이 곤고합니다.
그런 이를 볼 수 있는 눈, 그런 마음을 주께서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를 사마리아로 이끌 듯이 우리의 교회로 이끌고 여기서 회복의 역사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스라엘 왕은
보십시오. 일은 지체없이 진행 됩니다.
부인은 남편 나아만에게 즉시 고했습니다. 이것은 단비와도 같았습니다.
나아만은 이 소식을 들고서 왕 앞에 나갑니다. 종 이스라엘 소녀에게서 들은 말을 왕에게 고합니다. 왕도 즉시 반응합니다. 신하 나아만 장군이 정말 나았으면 좋겠다...
‘가시오.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친서를 썼으니 이것을 들고 가시오...’
나아만은 이제 왕의 친서까지 들고 아주 당당하게 길을 떠납니다.
이미 나아만은 이스라엘을 향해 떠날 때 각별히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은 10만 달란트, 금 6천 세겔, 옷 10벌.?? 요즘 식으로 바꾸면 수억 원 이상 되는 선물 보따리입니다. 이것은 상대에 대해 극히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군마와 수행원들을 대동한 나아만 장군 일행은 거창했습니다.
우선 국경을 넘어서 이스라엘 왕이 있는 사마리아 성으로 갔습니다.
6절에는 친서의 내용이 있습니다. ‘이 편지를 가지고 간 나의 소중한 신하 나아만을 왕께 보내오니 부디 그의 나병을 고쳐 주시오’.
이스라엘 왕이 친서를 받으면, 왕은 자기네 선지자를 통해 병을 고쳐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3번째 사람을 봅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을 다스리던 8대왕 여호람입니다.
그는 나아만을 비롯한 아람 나라 일행이 도착하자 기겁합니다. 소동이 났습니다.
마치 예수님 탄생 시 멀리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헤롯궁에 도착했을 때를 기억나게 합니다... 궁에 소동이 낭 것입니다..
아람왕의 친서를 받아들은 여호람 왕은 극도의 슬픔의 표현으로 옷을 찢었습니다. 아, 이를 어쩐단 말이냐. 당시 이스라엘은 아람의 위세에 눌려 있었습니다.
그는 아람 왕의 말을 전해 듣고는, 자신이 그 문둥병을 고쳐 달라는 말로 잘못 받아들인 것 입니다. 이러한 심각한 병, 불치의 병을 고쳐 달라고 하는 것은 시비를 거는 거야. 이제 나병을 핑계로 큰 전쟁이 나겠구나...
여호람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습니다. 이게 명색이 하나님의 나라의 지도자입니다. 저 멀리 이방 땅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소녀가 있는데 여기 이스라엘 땅 왕궁에는 불신앙의 왕이 있습니다.
외지에 붙들려가 종노릇하는 소녀에 비해 이 왕은 얼마나 더 담대해야 할까요? 더 큰 믿음이 있어야 하지 않나요?
자기가 하나님 백성을 대표하고 있는데... 자기 나라에는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도 있는데, 그런데 이렇게도 허둥대는 모습은 무엇입니까?
성도 여러분, 왕은 왕 다운 믿음을 가져야 하고 제사장은 제사장다운 그것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왕처럼. 그러나 여호람은 아닙니다. 이방 나라 장군 앞에서 오그라들고 쩔쩔매고... 얼마나 초라합니까? 무기력 합니까?
자, 여호람은 누구를 상징할까요? 신분으로 포장된 신앙인입니다. 교회 경력으로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전혀 그러한 믿음의 실력이 없는 이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직분이 우리의 믿음의 실력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교회 경험이 많다고해서 견고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내가 믿음이 큰 줄 알았어. 근데 막상 일이 닥쳐오니까 내가 아니더라구. 허접하더군- 그런 생각 든적은 없나요?
늘 믿음을 말하고 신앙을 가르치는 목사도 그렇습니다.
생각해봅니다. 막상 내게 어떤 일이 다가 왔는데... 내가 풀 수 없는 문제가 다가왔을 때 속절없이 무너지고 낙심하는 것은 아닐까?
나와 여러분이 혹시 여호람 같지는 않을까요? 겉모습은 그럴 듯합니다. 교회 연조도 화려합니다.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우리끼리는 이러고 큰소리도 치는데 그런데 정말 내 신앙도 그러한가?
건강 검진이 끈났는데 의사의 연락이 옵니다. ‘몸이 문제가 좀 있으니 재검합시다’. 이 의사의 한마디에 쪼그라들어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나님은 기억도 나지 않고 근심에 덮혀버립니다. 집안에 애들에게 문제가 발생하니 낙심 천만하여 사색이 되고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기도 빼고는 뭐든 다하고... 이게 실상이 아닌가요?
무술을 오래 연마하면 무술의 고수라고 합니다. 고수들은 얼핏 보면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공이란게 있답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믿음의 내공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다 비슷합니다. 그러나 막상 일이 터지고 모두가 흔들릴 때 그럴 때 의연합니다. 그 믿음의 실력이 드러납니다.
적국 장군이 찾아오면 그때 당당할수 있었어야 하듯이 흔들림 없고 지치지 않는... 그게 여러분의 모습이기를 원하니다.
그러나 여호람은 비록 왕관을 쓰고 있고 높은 자리에 있었지만 그 수준이 어린 소녀만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아만의 종들은
이제 우리는 4번째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다행히 아람 나라 장군이 왔다는 소식이 빨리 엘리사 선지자에게 전해집니다.
엘리사는 왕이 잔뜩 겁을 먹고 옷을 찢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마음이 답답해진 엘리사는 전갈을 보냅니다. '왕이여,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지 마소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나아만을 구원하셔서 참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있음을 나타낼 것이요. 그를 빨리 내게로 보내소서.‘
그래서 이제 나아만 장군 일행은 엘리사 선지자의 집을 향합니다.
작은 마을에 그처럼 높은 자가 온 적이 없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도 구경나왔겠지요.
그는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선지자의 집 문 앞에 섰습니다.
그는 일국의 군대장관으로서 자기가 말에서 내려 그 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알은 선지자는 그를 맞이 하러 나오지 않습니다. 교만한 자, 높아진 마음에 하나님의 은총이 고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잠시 후 엘리사의 종이 문밖으로 나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전달합니다. ’장군은 요단강으로 내려가서 7번 몸을 씻도록 하시오. 그러면 나병이 나아서 그대의 살이 깨끗해질 것이요‘.
나아만은 모욕적으로 느꼈다. 그럴만도 하지요. 혹시나 해서 병을 고쳐보려고 왔지만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엘리사가 나아만으로 하여금 요단 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게 한 것은 무엇입니까? 치료를 위한 행위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요구한 것입니다.
강물은 효험이 없습니다. 저도 요단강에 갔을 때 일부러 물을 손으로 만져봤습니다. 그리 수질이 좋은 것 같지 아노더군요.
그런데 그런 물에 일곱 번이나 씻으라? 이것은 완전한 순종을 의미합니다. 인내까지.
비슷한 예가 있지요. 예수께서도 한 소경을 치료하실 때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요 9:7)고. 이에 소경이 즉시 순종하여 가서 씻었더니 눈이 밝아져보게 되었습니다. 역시 믿음의 순종입니다.
그러나 선지자의 종의 말에 나아만은 불같이 노합니다.
괘씸하다. 나는 그가 몸소 나와서 내 아픈 곳에 손을 얹고 자기 신께 기도할줄 알았다. 그렇게 나의 나병을 치료할 줄 알았다. 그런데 뭐라고?? 아니 우리나라 다메석에는 요단강보다 훨씬 깨끗한 강들이 있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 이런 물에 씻을 이유가 있는가? 그는 화를 내며 발길을 돌립니다.
여러,. 나아만의 입장이라면 이해가 됩니다.
일단 그는 마음이 상했습니다. 나 나아만 장군을 무시하는가? & 저 혼탁한 물에 몸이나 담그라고? 이해 될수 없다.
여러분, 우리들의 행동에도 노하기를 속히 하는 어리석음이 있지는 않은가요? 그것이 모든 것을 망칩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본문의 네 번째 사람들을 주목합니다. 나아만의 종들.
왕하5:13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이 다급한 순간 나아만의 종들이 나섰습니다.
‘저 선지자가 이보다 더 힘든 일을 하라고 해도 장군님은 틀림없이 그대로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강에 가서 물로 씻으면 된다는데 그거 못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른 바 충고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태도는 주인을 노하게 하지 않는 지극히 공손한 태도였습니다. 왜냐하면 '내 아버지여'라는 호칭으로 존경과 충성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종종 충고란 이름으로 무례함을 범합니다. 누군가를 힘들게 합니다.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종들은 논리에 합당합니다. 정중하고 설득력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이름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유명합니다. 저들이 없었다면 이날의 기적은 없습니다.
분하여 그곳을 떠나던 나아만은 다시 돌이켜 요단강물로 들어갔습니다!
왕하5: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결국은 나아만은 장군 복장도 벗고 계급장도 떼고 알몸으로 요단강에 들어갔습니다. 한번 두 번...일곱 번을 씻으며 철저히 순종의 잔을 채웁니다.
이로써 나아만의 나병은 떠나갑니다. 그 살이 어린 아이와 같이 부드럽게..됩니다.
이는 순종적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모든 길은 순종을 통해서 열립니다.
우리와 그들
그런데, 그 은혜에 도달하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린 소녀. 왕. 종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아만은 참 인복이 많구나. 병에 걸리거나 어렴을 당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런데 귀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귀한 만남은 내가 귀하게 대할 때 비로소 형성되는 것입니다. 나아만이 어린 종 소녀의 말을 귀여겨 듣고, 또 종들을 통하여 결국 선지자의 말을 순종으로 듣고... 그래서 인복이 채워집니다. 그 인복이란 게 들을 귀가 있는 자에게나 가능한 것임을 기억합시다.
이제 이 말씀을 우리들에게 댕겨봅시다.
우리 자신이 나아만의 처지일 수 있습니다. 물론 나병은 아니지만 뭔가 심각한 고뇌와 낙심을 가지고 있을수 있습니다.
우리 중 누구는 어린 소녀 입장입니다. 내 환경이 좋은 것은 아니나 그러나 이웃을 향한 마음이 있습니다. 내 주위에는 나병에 신음하는 어려움에 한숨짓는 이가 있는데 더구나 그는 나에게 해를 끼친 자, 미운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복음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여호람 왕일 수 있습니다. 내 신분이나 외형은 문제가 없습니다. 다복하고 무슨 부족함이 없는 듯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달라요. 마음이 곤고하고 불안하고 흔들립니다. 내가 가진 믿음이 힘을 잃고 짝퉁 믿음을 방물케 합니다.
& 우리가 바로 나아만의 종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알수 없으나 그러나 그들은 유명합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장군은 초라하게 되돌아 갔고 그리고 나병으로 처절하게 마쳤겠지요. 그러나 종들은 지혜로왔습니다. 주인을 잘 조언했고 이끌었습니다 & 끝내 살려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피차 그런 조언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믿음의 여정에서 피차 그런 소중한 길벗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매듭하며
저도 생각해봤습니다. 나는 여기서 누구일까? 당연히 엘리사겠지. 주의 종인데....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여호람 왕인지도 몰라. 백성을 깨우치고 이끌 자리에 있었는데 막상 실상은 허접한 자... 교우들을 이끌고 주님 앞에 새워야 하는데 나 자신이 흔들리는 자...
생각해보십시오. 당신은 지금 누구입니까? 나아만? 어린 소녀? 여호람 왕? 혹은 나만의 종?
자신의 처지를 분석할 수 있다면 해결의 길도 보일 것입니다.
& 우리는 서로 간에 그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를 모아서 교회를 꾸려 주십니다. 우리는 서로 그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그 역할이란 게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처지와 형편은 가변적입니다. 그래서 오늘 내가 나아만이라며? 다음에는 소녀의 입장일 수도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왕의 처지 혹은 종의 처지.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어떤 것도 소홀히 여기면 안됩니다. 원수라도 우리를 돕게 하실 수 있고 누구라도 하나님의 통로가 될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 진지한 태도를 의미합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행복하게 끝납니다. 해피 엔딩.
아람 나라로 돌아간 나아만은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병만 치유된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도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은혜를 기억하며 평생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삽니다.
아, 요단강에 몸을 담근 나아만이 그랬듯이 보혈의 강물에 몸을 담근 우리는 더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남은 날들이 그렇게 복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