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leejw 2019. 9. 6. 16:25

               어쩌다 목회자

    

 

성도들은 목회자의 생활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나는 총회 교육국에도 있어 봤고 학교 교목 생활도 여러 해 했다.

이른바 기관목회이다. 그 생활도 한가롭지는 않다.

특히 교목 생활은 출근시 부터 퇴근시 까지 분요함 그 자체였다. 성경 수업이나 채플 인도는 기본 사항이고 그 외의 학교 내 모든 모임 회의 때에는 참석하여 개회 기도를 해야 했다.

그런데- 거기에는 퇴근이 있었다! 학생이나 교사들이 썰물 같이 빠져나간 교정, 거기엔 갑자기 정적이 찾아온다. 그 시간이 내게는 참으로 좋았다. 집중하여 여러 책을 쓸 수 있는 챤스였기 때문.

 

지금은 평범한 지역교회의 목회자이다. 큰 교회가 아니다. 그렇게 일이 많지도 않다.

그럼에도 이 일에는 퇴근이 없다. 교회와 성도들이 늘 같이 있다. 물론 전화나 일상이 24시간 이어진다. 그래서 월요일에는 휴무를 위해 아예 전화를 닫아 놓고 지내는 동료 목회자들도 있다.

 

주중에는 어떤가. 나는 일단 이른 아침 출근과 늦은 오후 퇴근을 고수한다.

때로 어떤 성도들은 사택으로 전화를 했다가 다시 교회로 전화하면서 목사님이 왜 교회에 계세요한다. 내겐 참 어색하다. 목사가 주중에 교회에 있어야지 사택에 있는가? 물론 그래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부교역자들이 함께 할 때에는 다 같이 출근하여 함께 경건회 후 일과를 시작했다. 그렇지 않은 요즘의 나 홀로 목회의 상황에서도 이 원칙은 지켜진다.

 

화요일은 주로 주일의 뒷마무리를 한다. 교회 방들을 두루 둘러본다(선풍기 등이 켜 있기도 한다). 결석자 접촉이 이루어지고 게시판의 변경사항 등을 갈아붙인다. 이전 같으면 화요, 목요 제자반을 했지만 요즘은 그 소집 자체가 쉽지 않다.

수요일은 수요 저녁 예배를 준비하며 어제 못다 한 일들을 첵크 한다. 밀어둔 통화들을 한다.

목요일은 서서히 주일로 마음을 집중한다. 특히 주일 설교의 기초준비로 들어간다. 본문 제목 방향들이 그려진다. 교우들이나 바깥 사람과의 만남이 있다면 주로 이날로 정해진다.

금요일은 본격 주일 준비이다. 성도들을 떠올리며 설교 원고가 거의 형성된다.

토요일은 마음이 바빠진다. 설교 원고 인쇄와 영상부에 넘길 자료 준비가 끝난다. 주보의 기본원고를 작성하여 넘긴다. 청소팀이 돌아간 후, 예배실 준비 상황을 챙긴다.

 

매일 아침에는 새벽 식전 기도를 끝낸 후, 교우들을 위한 큐티 본문을 보낸다(밴드와 카페). 그리고 간혹 페북에 짧은 글을 올린다. 외부 원고도 주로 이때 진행한다.

물론 내 경우, 지난해까지 노회 일을 봤기에 틈틈이 사무처리와 우편 발송하는 일이 계속됐었다. 다행히 금년은 무직이다.

주중 내내 마음 한쪽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A신학교 일이다. 출강자들을 첵크해야 하며 다녀온 분과의 후속 접촉을 해야 한다. 현지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을 챙겨야 한다.

기독교의 NGO인 CLC의 공동대표이지만, 요즘은 그 일 자체가 축소되었기에 큰 의미는 없다. 물론 수년 전부터는 주중에 나가던 총신대 강의도 끝났다.

 

이제 시간은 좀 생겼다. 허지만 늘 시간이 없다. 그냥 한가한 시간이란 불가능 하다.

중요한 것은, 이런 흐름 속에서 내 자신의 영적 삶을 챙기는 것이다. 나이 60이 넘어서야 보이는 것들도 있다. 자신의 영적 체온 유지야말로 가장 힘든 과제이다.

 

목회자는 목회하는 이이다. 국가는 목회도 노동이라 한다. 그래서 월수입에 세금을 내라고 한다. 세금을 내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다수의 목회자들이 최저 생계비 수준을 밑도는 터에 이것도 참 어색하다.


목사 안수식 때 선배들은 물었다. 일평생 십자가를 지고 가겠느뇨? 여러 면에서 십자가는 맞다. 그렇지만 목회의 길이 늘 고달프지만은 않다. 때로는 기쁨도 있다. 남모르는 보람도 있다.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어쩌다 목사일까?

그러나 내가 목사가 안 되었더라면 무엇을 하면서 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