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leejw 2009. 10. 19. 09:29

감사의 글을

 

설교- 이는 목회자의 영광이요 좌절이다.

 

신학교를 갓 졸업한 졸업생이 첫 번째 설교를 하게 되었다. 그는 크게 흥분했고, 설교를 마쳤을 때에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이 자기 설교에 큰 감명을 받았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차에서 그의 아내에게 자랑스럽게 물었다.

“여보! 지금 이 세상에 위대한 설교자가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오?” 지혜로운 아내는 조용히 웃으면서 대답했다. “... 당신이 생각하는 숫자보다 하나 적네요.”

 

아, 현숙한 아내의 가치를 반복 논하고 있는 잠언 기자의 말은 어찌 그리 타당한지.

예배 후 문턱에서 배웅 인사하는데 권사 두 분이 다가온다. ‘목사님, 오늘 설교 정말 은혜스러웠습니다요!’. 그러자 곁에 섰던 다른 이가 가로챘다. ‘그런 말 하지마. 우리 목사님 교만해져!’.

목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교만 때문이 아니라, 낙심 때문에 죽을 지경이라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격려는 메마른 목회자의 마음 밭에도 봄비가 오게 한다. 위축된 어깨를 펴게 한다. 25년을 멋지게 사역하고 큰 교회를 일군 후 은퇴한 목사님이 일러줬다. ‘설교는 일생 짐이야. 강단에서 내려 올 때는 늘 부끄럽지...’.

성공적인 목회자로, 설교가로 알려진 원로 목사님의 고백도 있다.

 

‘설교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설교 준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원고를 지우는 경우가 있다. 나도 감당 못하면서 설교라고 무작정 얘기해서 되겠는가. 100% 옳은 태도는 아니다. 그러나 바람직한 태도다. 하나님이 전하라고 했으니까 내가 비록 따르지 못할지라도 가르치고 전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지키는 것만 전한다면 성경의 10%도 전하지 못할 것이다. 듣는 사람뿐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가르치고 전해야 한다. 설교가 설교로만 끝나면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다 무책임하다. 그렇기에 설교의 영향력이 점차 왜소해지는 것이다’.

목회자는 그의 사역 일생 내내 그 설교의 짐을 감당해야 한다.

 

학교에서 채플을 마치고 교목실로 돌아왔을 때, 곁의 선생님이 다가왔다.

 ‘목사님, 목사님의 설교는 늘 새로워야 되잖아요. 우리야 같은 내용 그저 반복하면 되는데...얼마나 힘이 드세요’.

모든 설교자는 사실 자주 자주 그 짐에 눌려버린다. 한숨을 짓게 된다. 그래서 설교자에게는 격려와 애정이 요청된다.

 

영국에서 지낼 때 보니, 경기가 장기 위축 상태였음에도 우체국들은 제법 짭짤한 수입을 올리는 곳임을 알았다. 영국인들의 서로 카드를 주고받는 열심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일년 중 가장 큰 명절인 크리스마스 때에는 카드를 부치는 사람들로 비좁은 동네 우체국이 초만원이다. 부활절 때에도 역시 장사진을 이룬다.

그 뿐인가. 저들의 축하 카드의 종류는 인간 사 만큼이나 다양하다. 거대한 슈퍼의 한쪽이 아예 카드 매장으로 자리한다. 역시 가장 많은 분야는 감사의 카드...

 

우리에게 그런 기억은 없는가. 잊을 뻔 했던 이로부터 날아온 편지 한 장. 서먹한 사람으로부터 보내어진 따스한 카드... 그것은 우리의 삶을 온통 온기로 가득하게 한다.

우리 서로 카드를 보내자. 마음을 담아 편지를 띄우자.

 

수많은 사람 틈에 살지만 가장 외로운(?) 목회자에게 보내자. 당신의 카드 한 장이, 짤막한 편지 한 장이 탈진한 그를 싱싱한 사역자로 다시 세울 수 있다.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같으니라(잠25:25)

 

첨언/ 요즘은 이멜 편지도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