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영적 삶
숨겨진 뿌리
초등학교 시절, 어느 날 종례시간에 담임선생님은 흑판에 가로 선을 죽 그으셨다. 그리고는 그 선을 중심으로 위로 삐죽하게, 밑으로는 커다랗게 걸쳐있는 빙산을 그리셨다.
‘사람은 겉으로 드러난 것 보다 속으로 가리워져 있는 부분이 더 큰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야!’
코흘리개들이 뭐 알아들었을까 싶지마는 선생님의 얼굴은 자못 엄숙했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 이치야 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두고두고 짚어봐야 할 덕목이 아닌가 싶다.
신앙인에게도 겉으로 드러난 것이 전부인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런가하면 심해의 물이 깊듯이 그 깊음을 더해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일요일만 지키는 주일 중심의 신자가 있다. 그는 주일 예배의 ‘약발’로 화요일 정도까지만 버티는 사람이다. 지극히 피동적인 교인인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혹자가 한국 교인들은 모여서는 잘하는데 흩어져서는 쑥맥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모여서는 통성기도도 잘하고 찬송도 잘하고... 그러는데, 각자의 삶의 자리로 가면 아예 누가 신앙인인지 구별할 수조차 없다는 것.
결국 스스로 만들어가는 신앙이 없는, 피동적 신앙의 그 한계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스스로 하나님과 만나는 개인적인 사귐이 필요하다. 스스로 말씀을 펴고 거기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새겨듣고 그것을 내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 실천해 나가는 그런 사적인 작업이 있어야 한다.
앤드류 머레이는 그의 글에서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기 위한 조용한 시간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서 받아들이는 것과 성령의 세례를 요구하는 것 못지않게 아침에 깨어남을 계속 유지하고 그날의 첫 시간을 혼자서 하나님과 함께 보내겠다고 결심하는 것보다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더 위대한 일을 가져오게 하는 행위도 없다’.
(시 5: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큐티, 혹은 경건의 시간이라고 불리우는 이 시간은 종래의 새벽기도회와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 새벽 기도회는 여전히 피동적이기 쉬우나 경건의 시간은 스스로 말씀을 대면해야 한다. 물론 새벽기도회는 성도들이 합하여 기도할 수 있다는 한국 교회만의 강점이 있음도 사실이다. 이 두 가지를 따로 병행하든지, 혹은 잘 조화를 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한가지. 우리는 때로 자신의 기도생활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기도원을 찾는 경우가 있다. 산이 더 ‘신령한 곳’일리는 없지만, 집중하여 주를 사모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마다할 이유는 없다. 단지, 그것이 집중 기도이든 금식 기도이든 혹은 무슨 특별한 기도이든 자랑일수 없다는 사실이다(특히 기도원에 갈 때는 교역자와 사전에 그 기도원에 대해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신앙생활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 전부가 되지 않게 하라는 것.
교회 와서 대표 기도하는 것이 기도생활의 전부이고, 교회 와서 성경 펴 읽는 것이 말씀 생활의 전부라면- 당신은 뿌리가 실로 빈약한 나무와도 같다. 바람이 부는 날-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봉사하고 일하는 것이 앞서 가지 않게 하라. 자신의 뿌리가 깊어가는 가를 고민하라.
톨스토이의 ‘인생의 길’에 이런 글이 있다.
학식이 높은 랍비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얼굴이 지독하게 못생겼다.
어느 날, 랍비를 찾은 황후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오, 그대는 귀중한 지혜를 참으로 못생긴 그릇에 담아두었구려!"
랍비가 정중하게 물었다. "황후 폐하, 왕궁에서는 술을 어떤 그릇에 담아두고 있는지요?" "술이야 독에 담아두는 것이 아니오?" 랍비는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황제께서 드시는 술을 금그릇이 아닌 질그릇에 담아 두신단 말입니까? "
황후는 그 후 술을 금그릇에 옮겼다. 그러나 술은 모두 맛이 변해버렸다.
황후는 그 랍비를 불러서 따졌다. "그대가 금 그릇은 술맛을 변하게 한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을 텐데, 어찌하여 내게 그런 일을 권했단 말이요?"
랍비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저는 다만 귀중한 것도 때로는 보잘 것 없는 그릇에 담겨있을 수 있음을 황후께 가르쳐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당신은 혹 겉 그릇만 치장하는 사람은 아닌지.
당신의 영적 삶- 그 뿌리는 안녕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