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요한 웨슬레가 노방 전도 집회에서 돈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었다.
"첫째,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많-이 버십시오" 그러자 한 수전노가 화답을 했다. "야 참 설교 잘 한다".
설교는 계속되었다. "둘째, 가능한 한 돈을 많이 저축하십시오" 역시 그가 맞장구를 쳤다. "저렇게 설교 잘하는 사람 처음 봤소". 마지막으로 웨슬레는 외쳤다. "세째, 벌어서 저축한 돈은 선한 일을 위하여 남김없이 쓰십시오!"
그러자 그 사람이 벌떡 일어서며 투덜거렸다. "마지막에 가서 설교 버렸다!".
사람은 본능처럼 물질에 애착을 가진다.
그러나 건강한 성도는 물질에 대한 청지기 의식을 분명하게 가지고 산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온 것이요, 그 물질이 내 손에 있는 것은 책임있게 쓰고 그 결과를 보고해야 하는 입장임을 안다.
헌금 생활은 사실 하나님과 자신만이 아는 문제이다. 거기에서 셈이 반듯하고 정확해야 한다.
헌금은 나의 최선이어야 맞다. 아무 생각 없이 던져 넣는 식의 헌금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
생각해보라. 우리는 누군가의 애경사에 부조금을 낸다. 보통 상식적인 액수를 부조한다. 그러나 상대방이 내게 큰 의미를 갖는 사람이라거나 귀한 사람이라면 일부러 신경을 쓴다. 때로는 무리하게라도 부조를 한다. 왜? 거기 내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헌금 생활을 살펴보라. 주일 헌금을 작년에도 1000원, 재작년에도 1000원, 금년에도 1000원 낸다면 맞는가? 우리의 성장은 헌금과는 상관이 없는가.
물론 산술적으로 액수는 중요하지 않다. 누구에게 1000원은 최선이고 누구에게 1000원은 장난이다.
얼마를 드리던지 그것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하는 것이면 된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선한 기회들을 붙잡아야 한다.
성도들은 개인적으로도 물질을 드려 선한 일들을 하지만, 교회를 통해 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한다. 예를 들어 선교나 구제등의 일을 개인적으로 하는 것보다는 힘을 모아, 더 전문적인 연구와 더불어 함이 훨씬 효율적이 된다.
물론 우리의 헌금이 내적으로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쓰임 받는 것도 귀한 일이다.
보편적으로, 신앙의 안정된 자리에 들어선 성도들은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 그리고 삶의 감사의 사연에 따라 감사헌금을 드린다. 그 외에 교회에 따라 사역 헌금- 선교, 구제, 장학 등-을 따로이 드리기도 한다. 그러나 때로는 이런 일상의 드림 생활 외에- 힘에 겹도록 헌금을 드리는 일도 있다. 교회당 건축이나 교회적인 큰 사역을 진행할 때.
분명 한 것은 헌금은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것이요- 기명이든 무기명이든-, 얼마를 드렸든 그것이 자랑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드림은 그것이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 할 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감히‘희생’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인도의 지성 타고르가 쓴 <기탄잘리>에 이런 내용의 시가 있다.
‘나는 마을 길로 이집 저집을 구걸하며 다녔네. 그때 갑자기 님의 황금마차가 마치 꿈처럼 나타났네. 나의 희망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네. 님이 내게 베풀어 줄 보화를 기대하며 나는 기다렸네. 드디어 황금마차가 내 앞에 멈추어 섰네. 님은 미소를 지으며 내려왔네. 그 때 님은 오른 손을 내밀며 말했네. '그대는 내게 무엇을 주려고 왔는가?'나는 멍하니 서 있다가 전대에서 작은 낟알 하나를 꺼내어 드렸네.
그 날이 저물어 갈 즈음 내 자루를 털었을 때, 거기에 작은 황금 낟알이 있을 줄이야! 나는 땅을 치며 울었네. 님에게 나의 전부를 바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보다 오래 전에 다윗은 성전 짓는 일에 온 백성이 힘을 다해 물질을 드리자 이렇게 노래했다.
(대상 29:14)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