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저마다의 삶

세종시 사태- 사안과 사람을 구별 못하는 나라

johnleejw 2010. 1. 14. 11:53

사안과 사람을 구별 못하는 나라

 

다분히 감성적인 우리나라의 사람들은 대인관계가 이런 식이다.

예를 들면, 그가 왜 싫은가? 그냥 싫으니까 싫다 이런 식이다.

 

그가 주장하는 어떤 것이나 그의 어떤 점이 싫은 것 보다는 그가 싫기 때문에 그의 말이 싫은 것이다.

그래서 같이 어울려 사는 속에서도 ‘나는 그가 좋다. 고로 그는 옳다’ 식으로 대인 관계를 맺어가곤 한다.

 

나와 관계가 좋은 사람이라도 그가 틀린 부분은 틀린 것이다. 나와 관계가 평소에 안 좋은 사람이라도 그의 말이 옳을 때에는 인정해줘야 한다. 이걸 우리는 잘 구분 못한다.

 

평소의 우리 민족의 그런 감성적 패턴이 이번의 세종시 사태의 실마리를 어렵게 한다고 생각한다.

 

정부가 내놓은 세종시 수정안을 놓고 여론조사가 한창이다. 그 결과를 보면 '미운 MB가 하는 일'이기에 무조건 반대한다는 식의 지역 분석이 드려다 보임을 주인할 수 없다. 

 

문제의 근원지로 돌아가 보자.

세종시 문제는 순전히 선거 공학적 정략의 산물이었다.

제16대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는 충청도 표심을 잡기 위해 충청지역 천도안을 내걸었다. 그 즈음 몇 개월 앞으로 다가온 제17대 총선을 염두에 두고 당시 야당 이던 한나라당도 충청표를 의식해 법안처리에 묵시적으로 동조했다. 그 결과 이 천도안은 16대 국회를 통과했다.

그 후, 이 안이 헌재의 위헌결정으로 발목이 잡히자 다수당이 된 열린 우리당은 행정중심 복합도시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수도권 대 비수도권 의원 간의 격한 대립을 보였던 한나라당은 가까스로 권고적 찬성당론을 채택한 뒤 소수의원들의 참여로 행복도시에 당론을 모아준 셈이 되었다.

... 그 후 열린 우리당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참여정부의 진보주의적 개혁모델은 오늘날 공공정책의 도처에서 세종시 갈등과 같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세종시 수정안은 벌써 차기 대권구도와 맞물려 여야, 여여의 일대 결전장이 되어버렸다.

충청인은 볼모 아닌 볼모가 된 셈이다.

 

사실 한반도라는 전체 구도로 이 나라를 내다본다면 천도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다.

더구나 북한의 소용돌이가 가시화되며 통일 이후를 위한 논의가 가시화 되는 이 즈음에서 대한민국의 수도의 일부는 차리리 개성이나 평양쯤으로 이관되는 그림을 그려야 되는 정황이 아닐까.

 

나 역시 충청인이고 형제들이 고향을 지키며 살고 있다. 그러나 행정수도를 그리로 나누어 가려고 고집하는 것은 대국적이지 못하다.

지금 충청인은 이해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지금은 실질적 손익 계산을 부지런히 하면서 원론 사수를 명분으로 하는 야당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도지사가 지사직을 사퇴하고 도의회 의장이 탈당하고 의원들도 사퇴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러나 아무리 명분을 외쳐도 지역 이기주의 주장의 한도를 넘지 못한다.

 

국민과의 신뢰를 말하는 한나라당 일부는 자신들도 천도 의결에 동참한 주역이라는 사실이 족쇄가 되겠지만, 오류를 인정하는 결단도 진정한 신뢰를 얻는 길이다. 정치인의 약속? 그것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들 정치적 계산따라 가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약속, 신뢰 등을 말하면 생뚱맞다.  

 

밖에서 가장 강경히 천도를 외치며 원안을 사수하려는 야당은 수십년 후의 한국에 대해 책임을 질 각오를 해야 한다.

단지 자신들의 주장이었기에 오늘도 또 외치는 억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미운 MB가 하는 일이기에 막야야 한다는 지극히 감성적 논리로 나아가면 안 될 것이다.

 

아! 이 지루한 세종 목장의 혈투는 치열한 국제사회 속에서 내적 소진으로 다가온다. 대부분의 국민은 세종시로 인해 피곤하다.

국론을 분열시키고 여와 야가 동반자이기는 커녕 웬수가 되고 있다. 또 다시 지역감정이 부추겨 지고 있다.

 

각각 주장들을 내세우고 목소리들을 높이고 있지만 숨은 진실은 분명히 있으리라.

그 진실 앞에 정직한 길만이 다 같이 윈윈 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