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전도자
준비된 전도자
모든 성도는 전도자이다. 이점에서 예외는 없다. 그러나 준비된 전도자는 참으로 드물다.
마치 하늘에 맴도는 매 처럼 이단의 전도자들은 맹렬하다. 준비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성도들은 너무나 순박하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당부하셨다.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다음은 적어도 우리 성도가 전도자로서 마음 속에 갖추어야 할 ‘장비’들이다. 귀뜸하면..
하나, 나중에 믿겠다는 자
사람은 내일 일을 보장 받을 수 없다. 내일은 내 날이 아니다. 하나님이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 나의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님으로 나의 맘대로 할 수없다.
(눅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혹 시간이 없다고 미루는 자에게는 ‘교회 나올 시간이 없으면 먼저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라고 촉구한다. 지금 믿음을 결단하고 주일 지키는 문제는 다음으로 미룬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곁의 강도는 절박한 순간에라도 주님을 영접함으로 낙원의 주인공이 되었다.
둘.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악인을 그대로 두는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저런 나쁜 자들을 그대로 두시는가?" 하나님이 이 말을 들으셨다고 하자. 그래서 하나님이 "그러면 좋다. 네 말대로 하겠다. 오늘 자정을 기해서 나쁜 놈들을 모두 다 죽이겠다"고 말씀하셨다 하자. 자, 자정이 되었다. 그러면 "나쁜 놈들을 왜 그냥 놔두십니까?"라고 질문했던 그 사람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 사람 역시 죽을 수밖에 없다.
우리 인간은 상대적인 시각으로 선악을 판별하지만 하나님은 절대적인 시각으로 보신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너도 나도 나쁜 사람에 속한다. 누구는 비록 다른 사람에 비해 조금은 나은 점이 있을지 몰라도 죄인은 죄인이다.
교양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남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악한 생각도 간과하지 않으신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 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나를 가만히 놔두실까?" 그 답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끝까지 참고 견디시면서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셋. 꼭 교회 나가는 사람만 구원을 받는가?
이 질문은, 기독교가 선한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는 종교일 것이라는 전제가 들어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선한 사람에게 구원을 준다고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죄인'이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이다. 기독교는 죄인이 구원받는 종교이다. 이것 때문에 오히려 기독교를 믿기가 더욱 힘들다. 정상적인 이성으로는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이 구원받아야지 어떻게 악한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 세상에 이런 종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만일 기독교가 선한 사람만을 구원하는 종교라면, 오히려 하나님은 불공평한 분이 된다. 악한 사람이 된 요인 중에 환경적인 것을 무시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는 잘못이 없는데 어쩌다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 도둑질을 일삼다가 악하게 된 사람도 하나님께는 구원받을 수 있어야 공평하지 않겠는가?
넷. 모든 종교는 다 마찬가지 아닌가?
보통 도교에서 그렇게 말하는데, 예를 들면 다섯 손가락이 모두 다른 것 같지만 손 하나에 다 붙어 있어 결국 한 손이라는 식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근래에 인기 있는 항목으로 등장한 ‘종교 다원주의’ 역시 비슷한 주장이다. 산의 정상에 오르는 길이야 여러 개가 있지 읺겠느냐는 것이다.
종교는 다 마찬가지이며, 궁극적으로 가는 길이 똑같다는 주장이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사람을 좀더 선하게 하고 생에 더 큰 의미를 가져다준다는 면에서 모든 종교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문제 삼는 것 - 나를 만든 이가 누구이며, 나의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등의 궁극적인 문제들 - 을 해결하려는 목적에서는 모든 종교가 다 같지는 않다. 기독교만 하더라도 다른 종교에서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고 이미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1+1=2 이며 다른 답이 없듯이 진리도 하나이다.
다섯. 진화냐 창조냐?
이 문제에 대해서는 관련된 책자들이 많이 나와 있으므로 그 책을 참조하면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진화론에는 적어도 다음의 일곱 가지 가정이 있다. 첫째는 무생물체가 생명체로 나타났다는, 우연 발생의 가정이다. 둘째는 그 자연발생이 오직 한 번만 있었다는 가정이다. 셋째는 바이러스, 박테리아, 식물과 동물이 모두 상호 관계한다는 것이다. 넷째는 원생동물이 후생동물을 만들어낸다는 가정이다. 다섯째는 각종 동물이 상호관계한다는 가정이다. 여섯째는 무척추 동물에서 척추동물이 나온다는 가정이다. 일곱째는 척추동물과 어류에서 양서류가 나오고 양서류에서 파충류가, 파충류에서 조류와 포유류 동물이 나온다는 가정이다(다른 말로, 양서류나 파충류가 원래 같은 근원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 일곱 가지 가정을 다 인정할 때 진화이론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 일곱 가지 가정의 실험적 증명은 불가능하다. 이 가정은 추측할 수는 있으나 증명할 수는 없다. 진화론자는 어떤 일련의 사건이 과거에 일어났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현재 조건에서 이런 것이 비슷하게 나타난다고 해도, 그렇다고 그것이 반드시 과거에 발생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결국 이것은 소망 사항일 뿐이며, 근거가 불확실한 믿음일 뿐이다. 즉 진화론이란 스스로 '과학적'이라는 믿음 속에서 증명될 수 없는 것을 붙잡는, 또 다른 신앙의 형태에 불과하다.
여섯. 왜 내가 꼭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가?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어릴 때 부모와 헤어졌다 하자. 오랜 세월이 흘러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부모님이 자기 이름을 부르며 찾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장 부모님을 만나러 방송국으로 달려가지 않겠는가? 마찬가지이다. 당신을 지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다.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죽은 귀하신 분이 지금 당신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분을 믿든지 말든지 당신이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일곱.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순신 장군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답은 잘 모른다는 것이다. 양심에 따른 심판이 있다(롬2:15). 그러나 이것은 양심대로 살면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양심대로 살지 못했다는 고발적 의미가 강하다. 복음이 들어오기 전의 사람들이 천국에 가느냐, 지옥에 가느냐의 문제는 하나님이 해결하실 일이다(사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떠난 존재들로써 형벌을 받음이 마땅한 자리에 있다). 우리는 그럼에도 하나님이 선하시고 공평하신 분이므로 그분이 알아서 적절하고 공평하게 처리할 것을 믿을 따름이다. 분명한 사실은 현재 복음의 기회가 있는데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여덟. 술 담배 때문에 교회에 나갈 수 없다.
교회에 오고 싶어도 그게 문제라면, 그렇다면 술, 담배를 계속하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라는 말이지 술, 담배를 끊으라는 말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을 믿고 나서 단정한 생활을 해야 되겠다고 스스로 술을 끊었다. 누가 끊으라고 해서 끊은 것이 아니다. 신앙은 술담배 같은 지엽적인 것들과 견줄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홉. 예수 믿으면 제사 못 지내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지으실 때, 영과 육으로 창조하셨다. 죽음이란 영과 육이 나뉘어져 고향으로 돌아가 는 것이다. 육은 흙으로 영은 하나님 나라로 간다. 결코 죽은 자의 혼이 떠도는 것 아니다. 기독교는 제사대신 추도예배를 드릴 수 있다. 부모님의 기일을 기억하여 후손들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부모의 덕을 기린다. 특히 부모의 신앙적인 삶을 되새기며 후손들이 다짐을 함께 하도록 한다. 기독교는 살아계신 부모께 최선의 효도를 강조하는 효도의 종교이다.
복음으로 준비된 자가 사람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