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leejw 2010. 6. 25. 10:27

권위, 과연 필요한 것인가?

‘물 위 걷기’ 증후군

 

‘권위’(authority) 라는 말처럼 이 시대에 배척되는 말도 드물다. 그것은 마치 낡아버린 옷처럼 구겨져 있는 듯하다. 그런데 타락한 시대의 특징 중의 하나는 위에 있는 권위를 부인하는 것 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권위’라는 말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성경에서 사용된 권위라는 말은 어느 의미에서 ‘신적 기원’을 갖고 있다 (민 14:17; 욥 26:12; 잠 29:2). 어떤 경우에도 궁극적으로 권세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귀속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Augustine)은 “하나님은 신앙과 도덕의 궁극적 권위이시다.”라고 한 바 있다. 이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성경의 권위야 말로 교회가 추구해야할 절대 권위라 보겠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 교회의 제도가 주는 권위는 없는가? 권위주의 청산의 시대에 우리 교회 안에서 주께서 주신 직분의 권위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우선 ‘목회자의 권위’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는가부터 생각해보자. 이는 상반되는 두 결합체로써 하나의 역설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땅 위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구상하신 지역 교회 안에는, 분명히 목회자의 직무와 그에 합당한 권위가 전제되고 있다. 교회 지도자의 직무에 대한 신약의 고전적인 구절은 아마도 에베소서 4장 11~12절에 나오는 바울의 권고일 것이다.

 

“그가 혹은 사도록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은 분명히 거룩한 일이다. 사역자들은 그들이 거룩한 것은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들 자신 역시 거룩하다고 믿어 버리려는 유혹을 자주 당한다.

 

내가 신학교 시절에 봉사했던 교회에는 다른 교육 부서를 맡고 있던 유별난 선배가 있었다. 그는 자주 자주 교사들 앞에서 자신의 아랫배를 한껏 내밀고 아래로 쓰다듬으면서 “주의 종한테 그게 뭐야?”라고 말하곤 함으로써 상대방을 난처하게 했었다.

이처럼 근자에도 금박으로 찍은 명함에 수많은 지객들을 박아놓고, 어떤 기회에서라도 자신의 모양새를 드러내려는 일부 목사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신자들의 목회자에 대한 기대 이상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애처로운 몸짓의 결과일 수도 있다.

 

이른바 ‘울 위 걷기’ 증후군이 그것이다.

블래춰(Bratcher)는 “사역자들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물 위를 걸을 수 없다. 그들은 다만 수영을 배울 수 있을 따름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사실이다. 목회자는 먼 나라에서 온 어떤 사람이 아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생의 고뇌를 안고, 때로는 의식주 갈등으로 골머리를 썩는 사람이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한 번은 선생님을 찾아 뵈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는 부모이다. 사례비를 쪼개어 낡은 세탁기를 바꿔야 될지를 고심하는 보통 사람이다. 때로는 남모르는 질병 때문에 진찰실 앞에 서 있는 쓸쓸한 환자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파에 초월한 듯한 얼굴로 옷깃을 추스르고, 강단에 서야 되는 우리들 중의 ‘한 사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