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의 한계
가르침의 한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 신자들은 그들의 목자에게 극히 사소한 문제들까지 기대는 경향이 있다. 마치,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랬듯이 어린아이의 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때로는 연약함을 즐기기도 하는 것이다.
“내게 하나님은 무리한 요구를 하지는 않을거야. 목사도 내게 봉사를 하라고 하지는 못해. 왜냐하면 나는 약하니까.”
그러면서 단단한 식물은 피하고 그저 젖으로 연명하는 아이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각각의 신자들은 인간 - 목회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너무 기대서는 안 된다. 주안에서 홀로서기를 연습해야 한다. 그래서 신자들은 그들의 목회자가 가지는 가르침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세우셨고 교회 전체에 걸쳐 매우 독특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사도들 조차도 성도들의 삶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개인적인 선택까지 간섭하려 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신약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면 사도의 권위는 교리와 하나이의 도덕률을 넘어서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성도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문제, 즉 누구와 결혼해야 하느냐? 어디서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떤 직업을 택할 것인가? 헌금을 얼마나 할 것인가? 누구를 찾아가 의논을 해야 할까? 등등의 문제를 정해주거나 제한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성도들 위에 군림하거나 자신이 존경받고 있음을 이용하려 하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해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남용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지도자는 다른 성도들에게 무엇이 하나님의 듯인지에 대해 권위 있게 말해주고 싶은 생각을 이겨내야 한다. 아무도 성령님을 대신할 수는 없다.
어떤 교회 지도자도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훨씬 잘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할 권리가 없다. 그렇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그는 사람들의 ‘주(主)’가 되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성령님’이 되는 것이다. 물론 사역자는 사람들이 내리는 결정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에 대하여 그들과 상담하고 조언하거나 경고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에게 합당한 결정을 내리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는 대신 그들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당사자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하려는 유혹을 꺾어버려야 한다.
또한 공적 예배 현장에서도 목회자는 숱한 시험에 직면한다. 이를테면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할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충동을 받는다. ‘카리스마적인 분위기’속에서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게 함으로써, 결국 하나님이 무시되고 가리워지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초월성이 극소화되고, 그분의 진리가 일반화 되어버리는 것을 범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된 지도자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서로를 위한 제사장의 자격으로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한다.
또한, 설교자로서의 목회자는 회중을 위하여 말씀을 선포하고, 마치 자신만 진리를 안다는 듯이 설교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위임한 대표자를 통하여 복음을 선포한다. 진실한 선포는 일차적으로 듣기 원하는 회중의 자원하는 마음에 달려있지, 자기 설교를 들어주기 원하는 목회자의 갈망에 있지 않다.
권위지향적 목회자는 설교할 때에 자기 영화와 권위의 남용이라는 유혹에 끊임없이 부딪힌다. 그는 자기를 하나님의 ‘선지자’, ‘대변인’, ‘대사’로 생각한다. 그는 자기 말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말의 성찬을 벌이지만, 결국 그가 전하고 있다고 믿는 하나님의 말씀은 위축되고 만다. 진실한 목회자는 회중의 입장에서 자유롭고 사려깊은 반응을 유도하는 자리에서 복음 전체를 설교하려고 한다. 그는 개인들과 몸 전체를 계몽하고 훈계하며 세워서, 마침내 그들 역시 삶과 사역에서 모범이 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권위 지향의 목회자는 지체들에게 교회 내의 선거 형태에까지 이러쿵 저러쿵 간섭하는 경우가 많아 성도의 제사장됨가 교회와 교단의 민주적 정치 원리를 위반한다. 그들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공정하지 못하다. 따라서 자유를 제한하고 공개토론을 피한다. 위압을 목적으로 때로 위협이 사용되기도 한다.
‘생각 이상으로 자신을 더 과대평가하는’ 목회자는 항상 ‘완전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올무에 빠지기 쉽다. 이러한 태도는 자신과 남을 속이는 것이 된다.
진정한 권위는 스스로 가장하는 것이 아니라 은은하게 배어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자연스레 주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
묘하게도 처음에 목회자가 부임하였을 때 좋은 관계를 맺었던 사람이 나중에는 그 목회자를 반대하는 사람으로 돌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사람들은 목회자에게 사실 그대로를 간단히 알리기를 원하기 때문에 호감을 갖는다. 그러다가 목회자가 자기와 맞지 않으면 이내 반대자가 된다.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 목회자가 잘 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자신을 결코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충성스러운 교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많은 사람들은 목회자를 그 초기부터 생매장시킨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자기들의 목회자에게 미친 치명적인 영향을 깨닫지 못하거나 혹은 그 목회자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진정으로 생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