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의 자리는
내가 주인인가?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는 교회 앞을 지나서 가게 되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이들에게 “저게 우리 교회다!”하고 자랑하곤했다. 그런데 어느 날은 한 아이가 지극히 놀란 표정으로 되묻는 것이 아닌가. “정말 니네꺼니?”전혀 뜻밖의 반문에 어린 나도 의아해했지만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 난감했었던 기억이 있다.
오늘날은 이처럼 유치한 질문이 낯설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교회 - 그것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누가 주인인가?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 상존하고 있는 장로와 목회자와의 문제는 적당히 얼버무리고 지나갈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마땅히 영적 전투에 나설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내적 소모전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싸우는 집의 아이들은 밖에 나가서 기를 펴지 못한다. 내분이 있는 교회의 교인은 바깥 세상에서 제 구실을 할 수 없다. 은밀하게 진행되는 장로와 목회자의 서글픈 파워게임은 교회에서 결단코 추방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 조사에 의하면 장로의 70%가 목회자의 갈등중에 있거나 갈등을 겪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들의 갈등 내용 중에는 주로 교회내의 직분자 임명권, 교회의 재정운용 등과 관련한 교회 행정처리에 관한 것이다.
그 외에 목회자 개인이 윤리나 인격이 문제가 된 경우도 많았다.
사실 장로는 목회자의 가장 가까운데서 목회자의 흠을 보게되고 그 그릇됨을 충고하고 격려할 수 있는 자리에 있다. 여기에는 상당한 지혜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목회자의 설교 내용이나 그 스타일이 맞지 않아서 야기되는 갈등도 만만치 않다고 보겠다.
그런데, 그 갈등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기도 하고 위기가 되기도 한다.
사실 덮어놨던 문제가 노출된 뒤에는 서로 간의 발전적인 방향 모색이 이루어지고 더 이해가 깊어지는 예도 많다. 그러나 갈등을 가진 장로의 34%는 여전히 문제를 끌어안고 갈등을 찌꺼기로 심연의 한 귀퉁이에 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문제들은 언제인가 곪아 터질 때까지 잠복돼 있는 상태라고 보겠다. 문제는 결국 ‘결별’이라는 최후의 처방으로까지 진행된 경우도 많음으로 교회가 큰 상처를 입는 예들이 있다. 즉 목회자가 교회를 떠나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장로 자신이 교회를 옮긴 경우도 20%라고 나타났다.
지상 교회의 문제는 항상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처리하는 방법이다. 교회 안에서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 하는 문제는 이미 드러나 있는 비밀이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목사를 강단에서 내리치고, 장로는 교회 재정을 움켜쥐고 목사의 목을 죄기도 한다. 마치 외나무 다리 위에서 힘겨루기를 하는 한심한 염소들마냥 싸우는 것이다.
다시 물어보자. 교회의 주인은 누구인가? 교회의 머리는 누구인가? 교회의 주도권은 누가 쥐어야 하는가? -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나는 이 사실을 모든 한국 교회가 다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분명한 대답은 이미 나와 있음에도 우리는 십자가를 향해 가시던 예수의 뒤에서 ‘누가 크냐’는 논쟁에 열을 올리던 제자들처럼 작아져 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자리에 서야 한다. 목사는 목회자의 자리에, 장로는 그 협조자의 자리에. 그리고 교회 안의 모든 직분은 철저히 섬김을 전제로 이해되어야 한다. 자신을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했던 노사도 바울의 교훈을 돼새길 때이다.
장로직이란 무엇인가?
장로직에 대한 한국교회의 오해는 그것을 교회안의 한 계급으로 구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집사는 장로가 되기 위한 중간 과정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분명히 집사는 집사로서의 고유한 직분이고, 장로는 장로로서의 고유한 직분이다. 각각의 임무가 다르고 그 각각이 소중하다.
그런데 엉뚱한 계급으로의 오해를 유도하는 것은, 장로임직의 과정에서 돈이 든다는 사실이다. 교회 기념품을 해놓는다는 얘기에서부터 이런 저런 돈이 필요한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래서 ‘돈이 없으면 장로도 못된다’라는 풍설이 교회 안팎에 나돌고 있다. 이는 분명히 시정되어야 할 폐습이다.
현재 장로교 헌법에 나타난 장로는 목회자 외에 치리하는 자로서 독립된 치리 장로이며 설교와 교훈에 대한 전무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러나 치리회나 당회에서는 목회자와 동일한 권한을 갖고, 또 노회와 총회에 파송받앗을 시에도 정식회원으로서 역시 목회자와 동일한 권한을 갖는다.
과연 성경에 언급된 장로라는 직이 오늘날의 교회의 장로인가는 회의적이다.
결국 후대에 교회의 필요로 만들어진 직책이라는 설이 더 설득력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4권 3장 8절에서 교회 안에서의 항존직으로서의 목사, 교사, 장로, 집사를 말하고 직분상으로 이들을 구분했다. 목사의 직무는 교회의 권징과 성례, 집례(예배인도), 성경강해등이고, 장로의 직무는 목사의 성례와 집례와 치리를 도우며 목사의 말씀사역에 대한 교인들의 반응을 알아보고 기독교인들의 윤리생활을 감독하는 것이다.
사실, 한 조사에 따르면 장로들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역할은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고 한다. 거기서 대표적으로 인식된 장로의 역할을 다섯 개 항목 즉, 목회자에게 격려와 조언을 하며, 기도와 심방을 통해 교인들의 영적 형편을 살리고, 교리의 오해나 부패를 방지하고, 필요한 때에 설교를 하거나 성경을 가르치고, 또한 직분임명, 재정등 교회 행정을 감독하는 것 등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항들을 얼마나 지혜롭게 주의하여 실행하는가 하는 것이다.
일례로 목회자에게 하는 격려와 조언이 때와 분위기, 혹은 어투등에 따라서 ‘지나친 간섭’으로 빗나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현실로 볼 때 장로가 교회에서 설교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이것을 우교회 교육의 한 부분으로 시행한다면 오히려 큰 덕이 될 것이다. 목회자와 장로는 분명히 직무에 있어 구별을 두는 직분이다. 그러나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목회자가 앞에 서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 말은 독자는 ‘가재는 게편이구만’하고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목회자가 첫째 자리에 위치 할 단 하나의 이유는 설교되는 말씀의 우위성 때문이다. 말씀은 교회보다도 위에 있다.
전에 내가 한 교회의 설교를 하러 갔을 때, 사회를 맡은 장로 - 그 교회는 몇 개월 전부터 담임목사가 유고된 상태였다 - 가 성큼성큼 앞서 올라가더니 강단 중앙의 의자에 올라가더니 강단 중앙의 의자에 앉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 순간 어느 목사가 부임해 오던지 꽤나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말씀이 우선되듯 말씀의 선포자가 예배에서 핵심이 되는 것도 마땅하다 하겠다.
하지만´이 모든 것을 떠나서 성경의 렌즈로 비추어 볼 때 목회자와 장로는 분명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온전히 하기 위한 각각의 지체이고 각각의 기능을 가진 고유 직분이다. 직분은 모두가 소중하다. 그러므로 주의 몸된 교회의 모든 직분자는 서로를 섬기며 피차 복종하며 (옙 5:21) 세우주는 성숙한 모습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낮아질수록 존귀했던 주님처럼, 목회자나 장로의 참된 ‘권위’도 겸손에서 비롯된다. 사실 목회자나 장로에게 있어서 설교나 행정, 혹은 능력이나 인간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를 닮은 겸손한 삶이다. 그 겸손의 원형은 성육신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이 곧 겸손이다.
겸손이란 힘있는 자가 그 힘을 포기하는 것이며 능력이 있는 자가 그 능력을 감추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됨을 포기하고 종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사람과 같이 되셨다.
우리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면서도 나는 저 사람과 다른 사람이라고 교만해질 수 있다. 겸손이란 상대방의 입장에 서는 일이며, 나아가 그와 하나가 되는 일이다.
목사와 장로, 그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별정직이 아니다. 무지한 양무리 중의 하나이며, 그저 줄반장 노릇을 맡았을 뿐이다.
한국 교회읜 원로인 조승제 목사가 쓴 「목회 예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1930년대 그가 청년 목사로 어느 지방 연합사경회 강사로 정력을 다해 성경을 가르치고 있는데 시무하는 교회의 어느 장로에게 장문의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섬기고 있는 목사가 사경회 강사로 와 있으니 격려하는 편지를 보낸줄 알고 반갑게 받아 읽었더니 그 편지는 너무도 뜻밖에 목사를 공격하고 비방하는 글이었다고 한다. 그 편지의 내용인즉 조목사의 설교는 너무 윤리, 도덕적 설교이며 일상생활에도 지나치게 유교풍습이 많으니 그런 일은 청산하라는 경교형의 글이었다고 한다. 조목사는 장로의 경고를 거의 다 인정하면서도 사경회 강사로 간 자기 교회의 목사에게 위로와 격려는 못할망정 공격하는 편지를 받고 많은 갈등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목사는 장로를 위해 기도하다가 돌아가는 날 집으로 가지 않고 먼저 장로를 찾아 갔더니, 뜻밖의 방문에 놀라면서 뉘우치는 기색이더니 그후부터 더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겸손을 바탕으로 한 상호존중 - 그것만이 목회자와 장로의 갈등을 풀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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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뛰어난 영적 힘과 인격으로 위대한 영적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 유다서의 저자 유다가 보는 고라의 모습이다. 유다서 1:17~19절을 보자.
겉으로 보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먼저 19절을 설명하기로 한다. 대부분의 현대 주석가들은 마지막 두 구절이 분열(당을 짓는 것)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이라는 점에 의견을 같이 한다. 이 사람들을, 세상에 속한 육적 사람들과 성령 충만한 성령의 사람으로 나눈다. 그들은 모임에 가서 이렇게 말하여 분열을 조장한다. ‘저 사람은 육적인 사람들이오. 그리고, 이 사람 - 우리를 따르는 자들은 영적인 사람들이오!’
이제 이것을 염두에 두고 18절을 살펴보자. 이 사람들은 옛 진리를 조롱하는 베드로후서에 나타난 사람들과 다르다.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조롱한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조롱한다. - ‘왜 당신들만 지도자가 되어야 하오? 우리도 지도자로 세움을 받았소!’ 이 사람들이 앞의 두 부류의 사람들보다 더 위험한 사람들일 경우가 있다.
여기에서 아주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모든 교회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지명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에게 반대하는 모든 사람이 개인적인 야망을 추구하는 냉소적인 사람들이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에게 지명받지 않은 어떤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권능 가운데 그들에 대하여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참된 기독교 지도자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회중들을 분열시키는 자들을, 그 지도자를 은사가 너무 없다고 조롱하는 자들을, 그를 모르는 자를 세상적이고 육적이고 성령의 지도를 따르지 않는 자들이라고 몰아부치는 자들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지도자인 체하는 자들을, 사람들로 자기들을 따르도록 유인하고, 그런 점에서 스스로 그리스도의 몸을 파괴하는 자로 드러나는 자들을 깊이 의심해 보는 것이, 또 그러한 자들 가운데 있는 고라의 표식을 꿰뚫어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딕 루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