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leejw 2010. 10. 3. 13:23

왜, 하필 사모입니까?

 

종종 과년한 딸을 출가시키려는 어머니들의 전화가 걸려온다. 데고나, 신앙을 가진 처녀가 그에 합당한 총각을 교회 안에서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어서 설핏하면 혼기를 놓쳐버리고 당황해 하는 부모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날 전화는 잘 아는 권사님이 딸의 중매를 부탁하려고 걸어온 것이었다. 신랑의 조언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듣던 끝에, 평소에 안면이 있는 총각 전도사가 생각나서 신학생은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자, 대번에 언성이 높아졌다. “왜 하필이면 사모입니까? 그 시집살이를 어떻게 시키게요?”

권사의 지론인즉슨 자기 딸은 사모 재목도 못되고, 또 숱한 교인들의 시집살이를 견디게 하고 싶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정말, 왜 하필이면 사모인가?

한 원로 목사의 사모님은 긴 한숨 끝에 “죄많은 여자가 사모하지.”라고 했었다.

목회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소명의식이 필수요건이다. 그래서 신학교 입학 면접에서는 이것이 아주 중요한 부분이 된다. 그런 뒤에도 오랜날을 신학 수업을 하며 준비하고 또 훈련을 받는다.

그러나 목회자의 사모는 놀랍게도 ‘자동적으로’ 사모가 된다.

 한 사모회의 모임에서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사모의 소명을 느끼고 준비한 사람은 전체 응답자의 34%에 밑돌고 있다.

 

 사실, 나의 아내도 목사 사모가 된다는 것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었다고 고백했다.

단지, 믿음 좋은 집안의 맏며느리가 되어 부모 섬기고 아랫사람 돌보며 그렇게 살고 싶었다고 했다. 단지 자신이 일생을 함께 하기로한 남자가 목회자가 됨으로 졸지에 목회자 아닌 목회자가 된다.

또 어떤 이는 남편이 목회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살아가던 도중, 갑자기 모든 것을 내던지고 신학교에 들어감으로 사모가 되어 버린다.

여기에서부터 모든 문제들이 파생된다.

 

준비되지 않은 마음, 때로는 미숙한 사모로서의 자질, 이런 것들이 교인들의 상대적으로 높은 기대와 감시(?)의 눈길이 어루어져 때로는 심각한 상태를 야기시키는 것이다.

아무래도 사모의 주된 역할은 목회자의 내조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내조란 목회자의 아내로서, 한 가정의 어머니로서의 역할뿐만아니라 목회자의 손이 미칠 수 없는 목회의 또 다른 부분들을 감당하는 문제까지 포함된다. 그럼으로써 사모는 자신이 싫든지 좋든지 단순한 주부의 자리에 안주 할 수 만은 없게 되었다.

 

사모의 유형을 셋으로 나누어 보면, 적극적으로 교회활동에 나서는 사모, 아예 일반 월급쟁이 아내처럼 가정에만 파묻혀 있는 사모, 그리고 간접적으로 참여하는 사모가 있다. 대개 큰 교회의 사모는 초연해서 집안에만 있으면서 남편만 보살피는 쪽을 택하나, 작은 교회일수록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가정을 지키며, 적극적으로 참가해야 할 때는 그렇게 해주는 시기적절한 지혜가 사모에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사모의 역할은 인간관계에서 평화를 창조하는 것이다. 평소에 성격이 급하고 불같은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 H목사의 경우, 사모는 자상하고도 부드러운 모습으로 남편의 ‘뒷치닥거리’를 확실히 감당하고 있다. 심하게 책망을 들은 교인의 집에는 저녁이면 영낙없이 사모가 찾아와 한참씩 머물다 간다.

 

한편, 적잖은 사모들은 교회의 필요에 의해서, 혹은 자신의 원에 따라서 교회의 일들에 개입한다.

예컨대 심방에 동행한다거나 구역 인도, 주일학교 교사, 상담 등이다.

드문 예이나 성가대원, 꽃꽂이, 혹은 반주를 맡아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 목회자 남편과 더불어 심방에 동행한다거나 여신도들의 상담역을 맡는 일은 사모로서의 중요한 역할임이 분명하다.

 

한국 교회는 교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60% 이상의 여신도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각양 각색의 배경과 신앙 경력을 가지고 있어서 다양한 요구를 사모에게 보낼 수 밖에 없다. 아울러 교회안에서의 목회자는 강단에 서 있는 주의 종으로 먼저 인식되고 있으므로, 그 주의 종과 사적인 관계에 있는 사모라는 한 특별한 여성을 향한 눈길은 묘한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혹자는 사모를 가리켜 모든 여성도의 ‘영원한 라이벌’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즉 때로는 부러움이, 때로는 호기심이, 때로는 조바심이 사모에 대하여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모들이 '우리의 목사님'을 과연 가정에서 제대로 모시고 있는지 조바심이 난다.

 

나의 아내는 남편인 목사가 체질상 야윈편이므로 자주 곤혹을 치른다. “우리 목사님 진한 뼛국물이라도 자주 해 드리셔야겠어요.” “사모님, 요즘 목사님 얼굴이 영 안됐어요.”

이런 말들로 아내는 죄없는 죄인이 되고 만다. 물론 관심이 사랑이다. 목회자에 대한 순수한 관심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표현이라해도 망발은 아니라고 믿는다.

그런데 그것이 자칫하면 외아들 장가보내고 새며느리 못미더워 부엌 들락거리는 시어미 꼴이 되기 쉬운 것이다. 그것은 속좁은 사모의 입장에서 보면 견디기 어려운 시집살이이다. 그래서 사모에게 있어 교인이 100명이면 100명의 시어미가 있는것이라고 한 것이리라.

 

사실,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만큼 여럿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여러 사람의 기준에 따라 그들의 입에 오르내린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 인간에게서는 커다란 어려움이 아닐 수 없다. 자식을 길러도 더 정이 가는 놈이 있기 마련인데 온 교인을 평등하게 사랑하고 똑같이 대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이 드는 것이다.

 

사소한 일 같지만, 사모의 외모도 교인들의 중요한 얘깃거리가 된다.

외모를 가꾸면 사모가 사치한다는 말이 들린다. 외모를 가꾸지 않으면 초라하고 궁색해 보인다고 비난을 받는다.

오래 전, 대교회의 부목으로 시무하는 친구가 하루는 심각한 얼굴로 토로해 왔다. 어느날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니 아내가 귀걸이를 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너무 뜻밖의 일이라 어찌 된 것이냐 물으니, 500원 짜리인데 길가에서 사 봤다고 하더란다. 남들 다하는 귀걸이인데, 집에서라도 한번 달아보려고 샀더란다. 그리고 몇 번씩이나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더라고, 그런 아내를 바라보면서 그는 사모도 사모이기에 앞서 평범한 가정 주부요 한 여인일수 있다는 사실을 일부러 외면하고 살아온 자신을 발견케 됐노라고 했다.

 

일반 여신도에게는 아무런 거리낌이 되지 않는 것들이 사모에게는 사모이기에 조심스러운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할 때 어머니 같이 친 형제같이, 사랑과 이해로 대하는 교인들이 있는가 하면 아무런 생각없이 사모를 얘깃거리로 삼는 이도 있다. 그래서 적지않은 수의 목회자들은 아예 자기 아내가 교인들 눈 앞에 띄지 않도록 하려 하고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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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목사의 아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기도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의 남편들은 사모인 우리가 교회에서

어떤 일을하는 것보다는 끊임없이 기도의 지원을 해줄 것을 원한다. 우리가 이런 필요한 일을 하지 않으면 목사는 명예를 주는 것은 아니나 영적인 일이 이루어진 곳에 놀라운 열매를 맺을 것이다. 남편과 회중을 위하여 매일 매일 열시미 기도하며 생활한 일개 목사의 아내가 어떤 변화를 이루어 놓았는지는 영원한 시간만이 보여줄 것이다. 끊임없는 기도생활과 회중을 위한 순수하고 고도높은 애정을 갖고 바울 서신을 정독할 때 거기서 바울이 얼마나 자주 그 편지 상대자에 대한 사랑과 그들을 위한 일상 기도를 이야기 하였는지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은 사람들 속에서 생겨나는 약을 고쳐야 했던 적이 많았으며, 때로는 혹독하게 꾸짖은 적도 있었으나 그들은 듣고 귀를 기울였다. 이 사람들에게서 바울이 승리를 거둔 이유는 그의 봉사가 기도 속에서, 사랑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목사의 아내로서의 당신의 일이 기도와 사랑속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축복받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리라는 것이 당신을 위한 필자의 기도이다.

D. 펜트코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