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기도자는 별개다(?)
목사의 가장 힘든 순간은 설교 직후이다.
오늘 설교를 잘 했는가 하는 문제는 둘째이다.
내가 그 설교에 합당한 자인가하는 자책 때문이다.
아니 이 고민은 설교를 준비하기 시작할 대부터 배태된 것일 수 있다.
그래서 그 고민을 안고 강단에 서며 강단을 내려 온 후 자신
을 또 다시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이 부담이 사라진다면 그 때부터 설교자의 변질은 시작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부담은 어쩌면 교인들 앞에서 살아야 하는 목회자의 평생 멍에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와는 다르지만 유사한 고민을 주는 경우가 있다.
교인들의 대표기도이다.
나 기도자는 나의 기도에 합당한가.
주로 장로나 권사 등의 중직자가 주일예배에 나서게 된다.
수요 예배 등등을 합치면 웬만한 교인들은 다 대표 기도자라는 입장에 서게 된다.
기도는 분명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대표기도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을 터이다. 물론 회중 앞에 서는 연고로 회중을 전혀 의식치 않음은 불가하겠지만, 기도자로서의 본연의 자세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그런데 대형교회가 아닌 교회들에서 대개의 대표 기도자들은 은익 된 자가 아니다.
그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목회자도 알고 교인들도 아는 바로 그이다. 회중은 그의 대표기도에 동참하기 전에 그의 이름을 알고 그의 삶을 안다.
그런데- 그 기도자가 자신의 삶과는 전혀 유리된 기도를 거침없이 쏟아낼 때 회중은 참으로 앉아 있기가 민망하다. 심지어 어떤 교인은 눈을 뜨고 기도자를 망연자실 바라보기도 한다!
나는 기억한다. 너무 너무 매끄러운 기도들을.
일상적인 내용은 그렇다하자. 그런데 내용이 ‘너무도 영적인’ 그런 기도를 들을 때가 있다. 그야말로 자신의 삶을 온통 십자가 앞에 내려놓은 듯한 기도를 접할 때가 있다.
아, 문제는 그가 전혀 그런 진지함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자라는 것이다. 이 때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온다. 섬뜩함 마저 느껴진다.
이전에 섬기던 교회에서의 일이다.
그 권사의 기도는 너무 너무도 정돈된 기도였다. 언어의 매끄러움은 차치하고 내용 역시 아! 신앙이란 저런 거야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와 마주 앉아 대화할 때면 너무도 낯선 타인을 느껴야 했다. 지극히 세속적인, 전혀 신앙과는 상관없는 사고의 자연스럼... 이것을 어찌 설명하면 좋단 말인가.
요즘은 대세가 대표 기도자가 미리 기도문을 작성하여 읽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억 속의 그는 대표기도를 할 때에 원고를 가지고 나가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원고 기도를 하는 것에 비해 그는 차별화를 원했을까. 어조를 높혀 기도했지만 그 순간의 애처로운 열심이 한 주간 뜸했던 기도 생활을 덮어버릴 수는 없었다. 그의 기도는 상채기 난 유성기 판 처럼 제자리를 맴돌았다. 회중은 조바심치며 숨을 죽여야 했다. 엉뚱한 실수라도 할까 봐.
또 다른 이의 기도를 기억한다.
그가 매번 되풀이하는 내용 중 하나는 ‘가난한 이웃을 열심히 도우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는 회중을 정말 난감하게 만들었다. 그가 그렇게 살지 않는다는 것을 온 교인이 다 아는데... 그는 자기 동기간에도 인색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과연 기도는 기도자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도 되는 것일까.
대표기도는 그저 하나님께 대한 립 서비스이면 되는 것일까.
오늘 우리 모든 대표 기도자가 고민하며 돌아볼 대목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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