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그리고 목양/말씀영상

12.17주일 예수님이면 족합니다

johnleejw 2017. 12. 23. 09:11

- 12.17주일은 영상에 이상이 생겨 설교 전문을 올립니다 -


 

                              예수님이면 족합니다

 

16: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16: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16:5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 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16: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6:7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16:8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16:9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6:10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16: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6:12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본문은 우리 주님과 유대 지도자들 간의 마지막 만남을 보여줍니다. 이후로 주님은 그들과의 관계를 끝냅니다.

그 이후 주님은 택하신 제자들에게 온 힘을 기울입니다.

또한 우리는 본문에서 주님의 제자들이 얼마나 더디 깨닫는 자들인지를 보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물러간 후,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했을 때, 저들은 정말 빵의 누룩을 말씀하는 줄 알았습니다. 주님은 믿음이 적은 자들아 라고 탄식하시지요.

 

결국 오늘의 본문은 주님의 고독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의 가르침은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외면되었고 멸시를 받습니다.

또한 그가 뽑은 제자들 역시 스승의 말의 영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사역이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어지는 다른 장을 보게 됩니다.

만일 주님이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것으로 그의 사역을 끝냈다면 주님의 거룩한 사역은 실패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의 수난까지 묵묵히 가십니다. 부활로 최후 승리를 쟁취합니다. 그는 스스로 말씀하신 바의 한 알의 밀알이 되셨고 수천 수만배의 열매가 인류 역사 속에서 나타납니다.

, 그러면 앞에 나타난 주님과 유대 지도자들에 대하여, 그리고 뒤에 나타난 주님과 제자들에 대하여 각각 살펴봅시다.

 

두 그룹의 유대 지도자들

 

여기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두 세력의 연합입니다.

 

16: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본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물과 기름 같은 존재입니다. 모든 면에서 입장을 달리합니다.

그런데 그 둘이 종교적인 문제를 걸고 예수를 찾아갔다는 것은 참 엉뚱합니다.

바리새인? 보수적 신앙을 고집하는 그 시대의 전통주의자입닏ㄷ. 그들의 결함은 자기 것 만을 제일인 줄 알고 자기들의 잘못과 결함에 대해 반성할 줄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물안 개구리들과 같았습니다. 자기들이 세상에서 가장 잘 믿는 줄로 잘못 생각하였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율법 선생들인 랍비와 율법학자들인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의 외적 규례들을 중시하였으나 보다 중요한 내면성을 무시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중요한 것은 외모보다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형식주의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면 사두개인은? 그들은 그 당시의 자유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을 존중했으나 다른 성경들은 무시하였습니다. 그들은 구약성경의 많은 부분들을 불신하고 부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천사도 영도 몸의 부활도 믿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중시하는 인본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세상의 권력과 금력과 결탁한 세속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두개인을 바리새인들은? 현실주의자요 속물로 보았습니다.

반면에 사두개인들은 맨날 율법 얘기하는 바리새인을 광신자라고 불렀습니다.

, 그 시대에 힘 있고 부유한 집의 사람들은 어느 편일까요? 대부분 사두개파에 속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당대의 대제사장도 영적인 것을 부인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이라는 것. 그러니 그 시대의 영적 상황이 얼마나 황폐했겠습니까?

 

, 그렇게 서로 다른 두 집단의 사람들이 한 목적을 가지고 예수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시험하는 것입니다. 갈라져 있던 이들이 야합을 한 것이지요.

개들은 맹렬히 싸우다가도 산토끼 한 마리가 지나가면 싸움을 포기하고 함께 토끼 뒤를 쫓는다. 마치 그 형국이었습니다.

그러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제시한 것은 무엇일까요?

 

16: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그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라.

여기서 하늘은 하나님을 완곡하게 나타내는 유대인의 독특한 관습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에게서 직접 오는 표적이었습니다.

그 두 집단이 어떻게 이 주제에 합의했을까요?

바리새인들은? 마귀와 거짓 신도 땅에서 기적을 행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오천명 4천명 떡을 만들어 먹이는 것은 마귀도 할수 있다... 땅의 기적이니까. 그러나 태양이 멈추고 하늘에서 불이 내리는 건.. 그건 예수도 못할 거라고 여겼습니다.

예수가 병자를 고치고 무리를 먹이는 것은? 다 땅의 기적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이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위로부터 오는 요란한 것들을 표적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기를 마다하셨습니다. 주님은 하실 수 있나? 얼마든지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마다하십니다.

저들은 단지 시험하기를 원했습니다. ‘저 예수는 귀신의 왕의 힘으로 기적들을 행한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오는 이적은 못할꺼야. 우리 함께 가서 예수에게 요구하자. 그러면 올무에 걸린다’.

 

그럼 사두개인들의 입장은? 그들은 원래부터 기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로부터 오는 이적 같은 것은 있을 턱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 점에서 저들과 바리새인들은 공통점을 찾았습니다. 우리는 서로 상반된 입장이지만 예수를 치는 일에는 함께 가자. 그래서 그들은 공동의 적개심을 가지고 예수에게 온 것입니다.

 

주님의 답변

 

그들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뭐일까요? 그래? 뭐 기적이 필요해? 하지 뭐.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조용하면서도 날카로운 주님의 위엄을 보십시오.

 

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의 눈먼 영적 상태에 대해 질책하십니다. 유대 사회를 대표하는 최고 엘리트 집단인 그들의 수준은 날씨를 분별하는 정도였습니다.

중생치 못한 자들은 세상 지식과 세상 판단력은 있어도 영적 판단력은 없습니다. 메시아가 오셨다는 시대의 표적들은 너무 많았습니다. 구약 예언들은 성취되고 있었습니다. 메시아의 베들레헴 탄생, 다윗의 자손으로 오심, 소경과 벙어리와 앉은뱅이 등 병자들의 치료--이것들은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표적들이었습니다. 메시아는 확실히 오셨습니다. 그러나 소경된 지도자들은 시대의 표적들을 분별할 힘이 없었습니다. 눈이 먼 자들은 보아도 볼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덧 붙히셨습니다.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시니라

 

너희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

그들은 스스로 악할 뿐만 아니라 주변에 악을 끼치는 자들이었습니다.

음란한 세대란 말은 영적인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음란한 창녀가 된 것입니다.

너희 같은 자들에게는 과거의 표적, 요나의 표적 외에는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나를 아시지요? 그는 죽음에 던져졌다가 다시 살아나 니느웨에 가서 심판의 말씀을 외쳤던 선지자입니다.

이는 조만간 다가올 예수님의 죽으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가 다시 살아나사 저들의 전통주의와 이성주의를 다 정죄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는 모든 표적 중의 표적이십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삼일만에 다시 사심의 사건은 불신앙적 세상을 위해 주시는 마지막 표적입니다. 이 표적 앞에 사람은 가부간에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그를 거부할 것인가? 또 다른 표적이 필요치 않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답답하고 안타까웠습니다. 수많은 표적을 보고도 표적을 요구하는 그들의 악함을 보시며 서글프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주님을 믿고 따르지만 우리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말씀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또 때를 따라 주시는 여러 주님의 손길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경제 동향은 밝고 부동산 경기의 흐름은 잘 알지만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세상의 변화들은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시대의 변화를 따라 자녀들을 남보다 앞서도록 여러 가지 대처들을 하지만 이 어둡고 악해지는 세상에서 우리 자녀들에게 영적 대비를 시키는 일들에는 눈을 뜨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두개인들과의 만남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닫혀있었습니다.

주님은 너희에게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그 뒤에는? 그들을 떠나가시니라.

섬뜩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저들의 상태가 도저히 구제받을 수 없는 상태였음을 보여줍니다. 끝내 완고한 자들로부터 거절당하신 왕은 그들을 떠나십니다.

 

주님과 제자들

 

이제 왕 되신 주님과 그의 제자들에게로 눈을 돌려봅니다. 그들은 호수 건너편으로 갑니다.

마가는 당시 정황을 설명합니다. 8:14배에 떡 한개 밖에 그들에게 없더라는 말씀..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직전의 칠병 이어 사건이 호수의 서쪽이었다면, 아마 이곳은 한적한 호수의 동쪽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건너편에 이르렀을 때 주님은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16: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런데 왜 갑자기 예수님은 생뚱맞게 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누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룩은 빵을 부풀게 합니다. 이는 영적으로 부패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자기들 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부패하게 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누룩은 작은 것이지만 밀가루 덩이 전체를 발효시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의 거짓 가르침이 퍼지고 스며들어 영적으로 부패... 망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의 전통주의는 누룩과 같은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의 이성주의도 누룩입니다. 이것들이 번져가는 것을 주의하라. 이것을 경고하심으로써 주님은 제자들의 신앙을 보호하시고자 하십니다.

주님은 아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해치는 가장 음흉한 적이 신앙에 인간의 전통을 첨가시키는 전통주의입니다. 또한 기독교 신앙에서 초자연적인 것들, 영적인 것들을 제외시키는 이성주의입니다.

전통주의, 그리고 이성주의, 이 두 가지 적은 교회 역사상 계속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쪽이 극우라면 다른 쪽은 극좌입니다.

오늘날에는 바리새인들처럼 성구를 적어 이마에 붙이고 다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전통주의에 물들어 바리새인의 흉내를 내는 사람은 많습니다. 교회도 자기 전통이라는 틀에 묶이면 생동감이 사라지니다. 점점 굳어지고 경직되고 서로는 서로를 판단하고 비평합니다. 메마른 분위기가 되고 맙니다.

그들은 말씀보다 사람의 전통과 고집을 앞세웁니다.

 

또한 우리는 초자연적이며 영적인 것들을 인정치 않는 자연주의 이성주의에 대항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주의는 기독교를 하나의 윤리와 도덕으로 변질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믿으며 부활하심을 믿고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심을 믿습니다. 나아가 성령께서는 오늘도 우리 안에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며 그래서 우리에게는 수많은 자연적 혹은 초자연적 체험이 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은 현대의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시대의 누룩에 대한 주님의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경계해야 할 온갖 세상의 가치관들과 사상적 흐름들이 누룩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현대 사상의 큰 흐름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아래 선과 정의 도적의 기준들이 깨져버렸습니다. 신세대를 중심으로 번져가는 선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내게 좋으면 선입니다. 내게 불편을 주고 나의 취향에 맞지 않으면 그것은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지 악입니다.

 

교회 안에도 세상의 누룩이 자리 잡음을 봅니다. 천박한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교회에도 들어와 자리 잡습니다. 세상에서 쎈 사람이 교회에서도 쎈 자입니다. 부자는 부자일 뿐이지 잘사는 사람이 아님에도 정말 그가 잘 사는 사람인 것처럼 회자됩니다. 또 그걸 기도로 쟁취하려고도 합니다.

종교 다원주의라고 불리는 사상도 그렇습니다. 기독교도 종교 중 하나라는 분위기가 팽배해지고 교인들도 내 기분 나쁘면 언제든 갈아탈 수 있는 정도의 종교생활이 답인 줄 압니다. 이 모든 것이 누룩의 영향입니다.

 

지난 수요 저녁 히 6장을 다루었습니다. . 기자는 당대의 1세기 유대인 성도들에게 경고합니다.

더 나아가라. 도의 초보에 머물지 말라. 때가 오래되어 어른이 되었어야 하지 않는가? 여전히 유치한 아이라. 탄식합니다.

식당에 갔습니다. 곁의 식탁에 한 30대 남자가 가방에서 젖병을 꺼내더니 빨고 있습니다. 얼마나 어처구니 없겠어요?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신앙의 세계, 영적인 세계에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습니다!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그 겸손한 마음 어린아이들이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그 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십시오.

우리는 초보적인 교리에 머무는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성탄절이 지척입니다. 작년에도 그렇고 재작년에도 그렇고... 그저 그런 성탄입니다. 성탄절 예배나 참석하고 절기 헌금이나 쪼금 내주면 돼. 그 주님의 오심이 별로 감사하지도 않고 기대도 되지 않고...?? 작년보다는 금년이 더 성탄이 감사해야 합니다. 더 주님 오심이 기쁘고 그래야 합니다. 이게 성장입니다.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우리는 전통주의라는 누룩에 젖어서 안되며 이성주의라는 누룩에 오염 되어도 안됩니다.

 

제자들의 오해

 

그러나 제자들은 누룩을 주의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오해했나요? 제자들은 빵을 준비하여 오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그것을 지적하시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들은 저녁에 먹을 떡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보고 책망하셨습니다. 너희가 빈들에서 5천명이... 4천명이 .. 배부르게 먹었던 그것을 잊었느냐? 너희가 다 경험을 했도다. 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수없이 목격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며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믿는 예수님은 얼마 전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빵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신 분입니다. 그들이 이 기적의 빵을 군중들에게 직접 나누어 준 당사자들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저녁 걱정이나 합니다.

그들은 정말 주님과 함께 그 들판에서 산에서 기적의 떡을 나누었습니다. 남은 가루가 12광주리, 7광주리였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함께 하시는 한 먹을 떡을 걱정할 필요는 필요없습니다. 다 경험한 바 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실을 잊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제자들의 실수는 우리에게 반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과거에 믿음의 승리를 거두었다 해도 망각한 채 허덕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을 보장하지 않으며 오늘 내가 체험적 믿음이라 해도 그 믿음이 다시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살이에 대해 너무 염려하면 안됩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마라. 그건 다 하나님 없는 이방인들이 하는거야. 맞습니다. 고아들은 밥을 먹어도 뭔가 몰래 등 뒤로 감추어 놓습니다. 내일 아침에 뭐 먹지? 부모 없이 자라는 그 본능적 외로움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엄마 품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내일 아침 먹을 것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몰래 등 뒤로 음식을 감추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강하게 붙드십시오.

우리가 영적으로 소경이 될 때 우리의 믿음은 약해집니다. 제자들처럼 먹는 것에 염려가 되고 세상살이에 오그라들어 버립니다.

주님은 그런 제자들을 어찌 대하셨는가?

 

16:8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결국 무엇이 문제입니까? 믿음. 믿음의 부족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너희는 항상 먹는 문제만 생각하느냐?’ 이 말씀은 늘 세상 풍파에 휩쓸려 일희일비하는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번 주일에는 웃으며 다음 주일에는 인상 쓰고 오고... 이게 그냥 널뛰듯하지는 않습니까??

 

인터넷에서 한 교회의 추수감사절 예배를 보았습니다. 설교 도중 한 교우의 간증이 있었습니다. 보통 간증하면 뭔가 짠하고 할 말이 있는 자가 한다고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자매님의 간증은 달랐습니다.

늦게 결혼하고 아기를 가졌습니다. 태명도 짓고...

초음파 검사를 하러 갔더니 대학병원으로 가라, 아이가 아픈 곳이 한군데가 아니다....

대학병원 가니 아이가 사산50%, 태어나도 며칠 살지 모른다가 결과였습니다.

그 날부터 아이에게 찬송을 들려주며 지내게 됩니다.

어렵사리 출산을 했습니다. 아기는 숨도 쉬지 않고 심장은 멎어있고... 중환자실의 인공호흡기에 의지 한 달 열흘입니다. 아직 기적은 없고 아무 변화도 없습니다.

여기까지가 그 간증자의 실정입니다. 마지막 고백은...

그러나 매일 예수님을 생각하고 감사하며... 분명한 것은 하늘 아버지는 선하신 분이며 실수하지 않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붙들고 있습니다!

, 그런 상태에서 이 자매는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감사절 아침에 감사의 고백을 나서서 할 만큼.

 

요점은 이것입니다. ‘예수님만 계시면 충분하다는 것을 잊지 말라!’

예수면 다냐? 예수면 다다! 이런 자기 선언이 필요합니다.

 

매듭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 모습을 봅니다. 깨닫지 못하는 것은 같지만 두 부류로 나뉩니다.

아무리 깨우쳐 주어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사람과 늦지만 결국은 깨닫고 진리에 서는 사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전자라면 제자들은 후자입니다

 

제자들은 마침내 주님의 말씀을 이해합니다.

주님은 더디 깨달은 제자들에게는 실수를 거듭하더라도 인내로 기다려주셨습니다.

우리도 제자들 처럼 조금씩 아주 조금씩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으며 많은 사연들과 함께 제자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나 주님을 시험하러 왔던 바리새인 사두개인들, 그들에게는 등을 돌리셨습니다.

생각해봅니다. 만약에 우리가 간사함과 의심과 비판으로 가득한 바리새인들과 같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등을 돌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연약하고 어리석으나 어린아이 같은 겸손한 자라면 비록 더디 깨닫더라도 우리를 보듬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통주의의 누룩... 이성주의의 누룩... 그 어느 것에도 우리 자신을 걸지 않습니다.

왜요? 우리는 예수님으로 족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