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분보다 직책
교인이 교회 생활을 어느 정도 하면 대개 집사로 임명된다. 또 시간이 가면 권사도 되고 장로도 된다. 이것을 직분을 맡는다고들 한다. 그것이 무슨 계급인 냥 하는 풍토는 제발 지워져야 한다. 그래서 그 임직식은 간소해야 하고 임직받는 이는 축하를 받는 것이 아니라 ‘격려’를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정작 직분은 계급이 아니고 명예직이 아니고 희생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더 낮아져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런 공식적인 직분은 한 번 맡으면 대개는 ‘평생’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교회를 섬기는 것은 그런 걸치고 있는 ‘직분’이 아니라, 봉사를 위한 ‘직책’으로 섬긴다.
예를 들어 ‘김집사가 초등부 3-1반의 교사이다’ 하면 집사는 직분이고 교사는 직책이 된다. 무엇이 중요한가? 직책이다. 무엇이 우리를 성장시키는가? 직책이다. 그냥 집사인 사람, 그냥 권사인 사람이 가득한 교회... 무슨 힘이 있는가.
그러므로 장로도 뒷짐을 지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구석에서 섬기는 직책을 수행해야 한다. 안수집사입네 하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찾아 봉사해야 한다. 주차 안내를 굳이 맡는 장로, 화장실 미화를 책임지는 권사... 건강한 교회의 모습이다. 실로 건강한 교인은 자신의 직분과 상관없이 낮아져 섬기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270장).
무슨 얘기인가. 우리 모든 신자가 다 화목케 하는, 원수된 세상사람들을 하나님께 이끄는 전도자의 직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 아닌가. 전도하지 않는 권사, 몇년이 가도 단 한사람도 인도하지 못하는 집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큰 아이가 학교 도서관에서 슈바이쳐 전기를 빌려왔다. 모처럼 시간을 내어 훑어보았다. 거기서 다시금 감동으로 다가온 이야기...
‘밀림의 성자 슈바이쳐가 람바네데 병원에서 봉사하고 있을 때 아프리카에는 무서운 전염병이 휩쓸었습니다. 사람들은 열병으로 피를 토하며 죽어 가고 있는데 병실도 의료진도 모자랐습니다. 슈바이쳐는 아프리카 생명들을 하나라도 더 구하기 위해 모금 운동에 나섰습니다. 그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고향 역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사람들은 삼등칸에서 내리는 슈바이쳐의 모습에 의아했습니다. 그같은 유명 인사는 당연히 일등 칸을 타고 오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다음의 그의 말 앞에 사람들은 숙연해졌던 것입니다. “4등칸이 없어서 할수 없이 3등칸을 타고 왔습니다”
쭉정이는 작은 바람결에도 흔들며 으시댄다. 알곡은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있다. 자기 자리를 지킨다.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사람 치고 된 사람이 없다. 항상 자신을 낮추면 하나님은 세워 주신다.
(벧전 5: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교만한 자는 미워하신다. 그럼에도 우리의 옛 사람은 자꾸만 우리를 충동질한다. 너 밖에 없다고. 네가 우선이라고.
그래서 어디 가서도 자기가 으뜸이어야 되고 어느 자리에서도 자기를 자랑하기를 마다 않는 사람들을 본다. 구역 모임에 가서도 기회만 나면 나를 과장하고, 식당에서도 나 중심으로 움직이고, 전도회가 모여도 키 재기에 여념이 없다. 그런 사람은 남의 결혼식장에 가면 신부가 되고 싶어 하고 장례식장에 가면 시체가 되고 싶어 한다. 언제나 중심이어야 하니까. 우리의 교회도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그런 사람들이 가득한 모임이 만다.
그런 면에서 영어 단어는 재미롭다.
죄란 무엇인가? 내(I)가 가운데 있는 것-SIN.
교만이란 무엇인가? 내가 가운데 서 있는 것- PRIDE
언제나 "I"가 문제이다.
은혜의 강물은 겸손이라는 낮은 골짜기부터 채우는 특성이 있다.
(눅 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