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에서 일치로
하늘에 걸려 있는 어린 시절의 무지개는 가슴을 한없이 콩닥거리게 만들곤 했다.
지금은 그때의 그 감흥이 많이 사그러들었지만 여전히 무지개는 그래도 여전히 가슴에 잔잔한 여운을 남기곤 한다.
영국에 사는 동안에는 쌍무지개를 즐길 수 있었다. 비가 잦은 나라여서인지 무지개가 자주 걸리곤 했는데 그것도 보통 쌍무지개로 걸리곤 했다!
무지개가 일곱 색깔-사실은 그보다 더 많은 색깔이라고 자연 과학자들은 말하지만- 이라는 것은 이미 초등학교 시절에 다 알아버렸다. 빨주노초파남보-라는 사실과 함께.
그 무지개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7가지나 되는 다른 색깔들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게 빨강색 일색이라면 얼마나 흉물스럽겠는가. 온통 보라색 덩어리라면 얼마나 어색할까. 아, 다르다는 것은 조화의 전제조건이다.
사실 각각 다른 4개의 멜로디가 합해질 때 만 우아한 4부 합창이 만들어진다.
한 교회에 모여 있는 우리 성도는 서로 다르다. 가만히 보면 천양지차이다. 그러나 그 다르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는 얼마나 힘들어하는가. 왜 저 사람은 나와 성격이 다를까? 왜 저 집사는 나와 생각하는 입장이 다를까? 왜 저 권사님은 저토록 엉뚱하게 말할까?
그래서 우리는 함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우러진 삶의 합창을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다.
그 멋스러움을 보여준 교회는 안디옥 교회였던 것 같다.
이방인 땅에 세워진 첫 교회, 거기에 각기 개성이 다양한 지도자들이 함께 동역하고 있었다.
(행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예루살렘에서 파송받은 목회자인 바나바, 아마도 흑인이었을 시므온과 루기오, 대대로 교회에 저항하던 헤롯가문의 이름으로 소개되는 마나엔 그리고 그 시대의 엘리트인 사울...
너무도 다른 그들이 어깨를 맞대고 한 교회를 섬겼다. 그 결과 안디옥 주민들은 그 교인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 할 정도로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어냈던 것이다.
오늘 우리의 교회를 들여다보자.
한 교회의 교우들, 비록 한 솥 밥을 먹고 지내지만 많이도 서로 다르다. 학력도, 얼굴도, 나이도, 출신지도, 신앙 배경도... 그래서 한 가지 일을 내놓아도 각기 다른 의견들이 나온다. 괜찮다. 단지 이 다름이 어떻게 조화롭게 결론을 도출해내는가 만 남아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이야말로 우리의 성숙을 판가름하는 잣대이다.
본디 하나님은 우리를 서로 간에 차이가 있는 존재들로 만드셨다. 능력의 차이, 키의 차이, 후천적으로 학력의 차이, 소유의 차이, 신분의 차이... 그럼에도 그 차이가 ‘차별’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미국 리버티 신학교의 엘머 타운즈 교수는 교회 교육이나 교회 성장학 쪽에 참으로 해박한 학자이다. 그래서 그의 시간은 어느 학생에게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는 성장하는 교회들을 분석하면서, ‘동질 집단’을 하나의 요인으로 지목했다. 같은 성향의 사람들, 같은 배경의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룰 때 성장에 속도가 붙는 다는 것이다. 그 이론은 일반적인 타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주님의 교회는 이토록 다른 이들이 모여 각 지체를 형성하고 서로 힘을 모아 주님의 조화스런 몸을 이루게 되어 있다.
우리는 회중으로서 모여 공적인 예배를 드린다. 예배가 끝나면 부지런히 돌아가거나, 익숙한 몇 사람과 인사하고 같이 식사한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게 진정한 초기교회의 성도들의 교제의 모습일까 생각해본다. 늘 친한 사람 곁에 앉고 또 그들과만 수군순군 대화- 사실 신앙과는 별상관 없는 얘기들이다-하고는 볼 일을 다본 사람처럼 휭 돌아간다. 그리고 살다가 겪는 어려운 일들은 교회 밖의 친구나 이웃- 특히 안 믿는 사람들-과 상의하며 살아간다. 이게 실상이라면 우리는 다시금 생각해야 한다.
인생의 궁극적인 승리는 하나님 앞에 반듯하게 서고 자라가는 것인데, 이런 영적인 도움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은 피차 교우들 밖에 없다. 어떻게 형식적 만남만 가득한 오늘의 교회 안에서 그게 가능할 수 있겠는가. 결국- 소그룹이다. 보통 교회들이 갖고 있는 구역, 다락방, 혹은 목장 모임이다.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이루말로 다 할 수 없다.
내가 아는 한 사람은 교회를 떠나 멀리 이사를 갔는데도, 자신이 속했던 다락방 식구들과는 계속 교제하고 또 그 모임을 못 잊어 한다. 그래서 때때로 그 모임을 찾아가 교제를 나눈다.
진실한 삶의 나눔, 그리스도 안에서 공유한 성장, 서로의 부부관계의 회복, 각 가정의 희노애락을 함께 누렸던 그 깊은 만남의 경험들은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자기 가정을 열어 거기서 갖는 모임은 자기 희생, 겸손한 자기 오픈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맛을 누리는 이들이야말로 초기 교회의 영광을 누리는 건강한 성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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