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앞에 서기
어느 날, 출근을 서두르는데 전화가 왔다. 저 멀리 시골의 한 교회 장로님. 어떻게 나의 설교 테잎이 흘러가서 듣게 된 뒤 주신 전화였다. 감사의 말과 함께, ‘작은 교회라고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라는 부분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전해왔다. 이미- 오래 전의 테잎이었다.
내 기억에, 교회의 아름다움이란 그 교회의 사이즈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내용이었다. 교회가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의 뜻을 얼마나 받드는가에 따라 아름다울 수도 추할수도 있다는 내용.
내가 왜 이 전화에 위로를 누렸는가. 수개월 전 이 설교, 이 부분에 걸려(?) 교회를 떠난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모 큰 교회에서 상처를 받고 온 사람이라고 밝히고 그는, ‘그럼 그런 큰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입니까’라는 항변을 남기고 갔다. 그 상처가 너무 크기에 이 설교의 흐름이나 원래의 내용을 붙들지 못하고 떠난 그가 너무 아쉬웠었다. 그리고 아팠다.
오늘, 그 시골 교회의 장로님의 전화... 그는 아마도 크지 않은 그의 ‘아담한’ 교회가 갖는 고질적인 문제-그게 목회자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교회 자체의 어떤 왜곡인지는 모르나- 에 고통하고 있는 이가 분명하다.
이렇게 설교는 듣는 이의 입장에 따라 환영도 배척도 받는다는 사실에 놀라웁다. 그 본래의 내용보다 각자의 현실이 앞서서 그것으로 재해석된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건강한 성도는 말씀에 갈급하다. 말씀 듣는 일에 소홀하지 않는다.
자신의 선입관으로 걸러내지 않는다. 루터는 ‘설교가 성경을 얘기하는 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알려줬다.
당신이 말씀을 사모하는 자라면 이렇게 할 것이다.
깨달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설교에 귀를 귀울인다. 들은 내용들을 잊지 않고 새김질하며 기억한다,
깨달은 진리에 대하여 감화를 받도록 기도한다, 배운 바대로 신실하게 실천하기를 힘쓸 것이다.
그리고 부주의한 자세로 설교를 듣지 않는다. 팔짱끼고 눈감고 있는 것은 불경한 짓이다.
설교 중 쓸데없는 생각이나 졸음으로 말씀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설교 중 내게 오는 깨달음은 특별히 기록하라.
집에 가서 읽지도 않을 것을 계속 쓰거나 낙서하거나 주보를 읽지 않는다(특히 주보가 시험꺼리가 되지 않게 하라!).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설교 중에 들은 말씀을 묵상한다. 그리고 월요일 부터의 삶에 적용 실천하기에 힘쓴다.
교우들과 받은바 그 은혜를 나눈다.
(눅 8: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다음은 떠다니는, 그러나 생각해 볼 글이다.
10인 10색 예배시간
1. 설교시간에 멀거니 강단을 응시하는 멀대파(눈은 목사님, 생각은 멀리 출장 중)
2. 주보에 밑줄 긋고 교정까지 보는 꼼꼼파
3. 졸면서 끄덕끄덕 콤마를 찍는 아멘파
4. 수시로 시계를 들여다 보는 안절부절파
5. 옆사람과 글로 대화하는 청각장애파
6. 예배 후에 있을 회의만을 생각하는 회의 염려파
7. 설교시간에만 성경읽기로 시간 떼우는 나홀로파
8. 찬송 부를 때 입만 벙긋대는 붕어파
9. 기도시간의 틈을 노려 묵상(?)에 잠기는 기회주의파(어휴, 어제 못잔 잠 보충해야지)
10. 누가 왔나, 안왔나 두리번 거리며 인원체크하는 경비파(주로 각 기관의 회장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세)
당신은 어떤 유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