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서들

21C평신도훈련

johnleejw 2010. 10. 10. 15:33

 

 

 

 

 

근자에 한국교회 제자훈련의 대명사격인 '평신도를 깨운다'에 대한 이야기들이 새로이 회자되고 있다.

특히 그 진원지인 S교회에서 사역한 교역자들의 멘트를 통해서, 그 훈련이 갖는 약점이 지목되고 있음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이미 고인이 된 원저자인 O목사는 한국교회에 진정한 공헌을 했다.

선교단체에서나 주고받던 제자훈련이라는 용어와 시스템을 지역 교회에 접목했다는 점과 그 일을 한국 교회에 보급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수 없는 공이다.

문제는 그가 그 일을 시작하고 진행해온 시대와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그 시대에는 몰려드는 교인을 제자로 다잡는 일이 급했다면 지금은 이미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세상과 사회 속에서 제구실을 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야하는, 그래서 실추된 교회의 명예를 끄집어 올려야하는 위기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그 훈련 내용은 대한민국의 서울, 그것도 강남에서 효율적이었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서울의 변두리와 중소도시와 농어촌의 교회에서 적용되기는 태생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그런 면에서 S교회에서 훈련을 담당했던 사역자들을 통한 반성은 상상히 중요한 것이라 할수 있다.

한 지교회를 섬기기 위해 해외에서 돌아왔던 본인은 서울의 변두리의 한 작은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그 고민을 새로운 훈련 내용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당면적 고뇌를 피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출생한 것이 '21세기 평신도 훈련'(글샘. 이진우 저)이다.

교인을 그리스도의은 제자로, 구비된 사역자로 거기서 세상속의 증인으로 까지 세워야 한다는 것이 이 훈련의 핵심이다.

그 서문을 다시금 여기에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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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생각1.

미국의 윌로우크릭 교회를 방문했던 것이 1993년도 여름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른 일로 시카고를 들렀다가 호기심을 못 이기어 찾아갔었다. 시간이 주일 저녁이었는데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주일 집회의 뒷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생동감이 충만했다. 교회당과 시설들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당시 한국교회에 알려지기 시작하던 교회에 대한 궁금증이 ‘거의’ 풀리는 것만 같았다.

미국 내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던 이 교회는 90년대 중반부터 한국의 D교회를 통하여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교회의 ‘구도자 예배’를 기점으로 열린 예배와 시스템들이 교회들에 수입되었다. 담임 빌 하이벨스 목사는 교회 성장을 꿈꾸는 전 세계 교회 목사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한국의 많은 교회들도 이 교회야 말로 이 시대의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교회가 얼마 전 깜짝 놀랄만한 선언을 했다.

지난 32년 사역의 중심이 되는 철학과 그것을 구현하는 프로그램들을 점검한 책 <Reveal: Where Are You?>를 펴내었는데, 거기서 담임 빌 하이벨스 목사는 "지금까지의 사역 방향에 뭔가 큰 문제가 있다"고 고백했던 것이다. 그들은 “숫자로는 성공을 했는지 몰라도, 예수 그리스의 참된 제자를 만드는 일에는 실패했다”고도 했다.

이들이 발견한 핵심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교회에 수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교인들로 하여금 신앙적인 활동을 하도록 이끌었지만, 그것이 영적인 성숙함을 보장해주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교회는 지금까지 교인들의 신앙 성숙을 위해서 예배, 성경공부, 소그룹, 자원봉사, 전도 등 엄청나게 많은 프로그램을 돌렸다. 교인들은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여했고, 교회는 날로 성장했다. 하지만 교인들이 하나님과 이웃을 ‘정말로’ 사랑하고 있는가. 내적으로 제대로 여물어가고 있는가. 그 물음에 자신 있게 ‘예스’라고 대답할 수 없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들은 다시금,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해야 한다고 고백한 것이다.

윌로우크릭 교회의 처절한 성찰은 주목할 만하다.

저들은 교회 안에서의 영적 활동이 개인의 영적 성숙도와 함께 상승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십일조를 하고 전도를 하고 봉사를 하는 영적 활동과, 하나님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영적 성숙함은 궤를 같이하지 않았다.

그래서 반성적인 저들의 진단은- 교인들을 온전한 주님의 제자로 양육하기 위해서는 프로그램에 의존하던 목회방식을 버리고, 스스로 성경을 읽고 하나님과 단 둘이 만나는 영적 교제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그들의 그런 고민을 바라보며, 우리 자신을 돌아본다.

지금 우리 한국 교회는 수많은 프로그램 과잉증에 걸려있는 듯하다. 그래서 정체된 교회 성장을 탈피하기 위한 방향 없는 갈망이 목회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그렇게 말들은 안하지만 역시 ‘꿩 잡는 게 매’라는 것이 목회 현장의 은밀한 원리인 것이다.

방향을 상실한 배가 첫 번째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지도를 다시 보는 것이다.

지엽적인 논란을 벗어나서 우리는 지금 교회의 본질을 다시금 생각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성경으로 돌아가서 깊은 고민을 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란 과연 무엇인가. 이 세상 속에 교회를 두시는 주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성도란 과연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생각 2.

한때 대선 후보로 까지 하마평에 오르던 존경받는 한 원로의 대담 내용이다. ‘우리 사회를 보면 각론은 없고 총론만 있어요. 명분을 내세우거나 거대 담론, 이념화를 너무 중시하는 것 같아요. 저는 총론주의자보다는 각론 주의자입니다. 각론을 하다보면 저절로 총론이 만들어질 수 있거든요’.

마치 교회를 말하는 듯 하지 않은가. 원론에만 충실하고 복음을 정확히 이해하기만 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잘 해나갈 수 있는 것인가? 기독교인이 성령 충만하기만 하면 다른 문제는 다 풀려지는가?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주일 예배에서 근엄하게 예배하던 저들이 생활 현장에서는 숨어있거나 자포자기식으로 살아가는 이중적 존재로 살도록 방치하고 있지는 않은가.

군인은 체력이 기본이다. 그래서 새벽 점호 때부터 구보를 한다. 그러나 체력만 월등하다고 효율적인 군인이 되는가? 아니다. 각개 전투를 배우고 사격기술을 배우고 그래야 한다.

신자들이 주일 예배에서 감동을 받고만 나가면 월요일의 직장생활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챤 직장인으로서의 훈련이 따로 필요한 것이다. 심오한 구원론을 공부 한다고 가정에서의 문제가 풀리는 것이 아니다. 주안에서의 부모 노릇, 남편 노릇에 대해서는 따로 훈련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으로 지금 한국교회의 훈련 과정이나 성경공부 내용을 분석해보라. 모두가 그저 원론에 머무는 수준이다. 지나치게 사변적이다. 그리고 제한적이다. 그러나 실천 가능한 것이 비로소 온전한 진리가 아니겠는가.

(요일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한국 교회 전반의 유행하는 훈련 내용의 문제를 더 지적해보자.

우리의 훈련 내용은 한편으로 치우쳐 있다. 다분히 ‘의도적’이다. 무슨 말인가. 우리는 지금 ‘충실한 교인 만들기’에 온 힘을 쏟고 있는 형국이란 말이다. 교인을 교회 내에서 충성스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인이란 진정 그보다 넓은 개념의 사람이 아니겠는가.

주일학교 교사 세미나 등에서 자주 강조하는 말이 있다. ‘우리는 이 아이들 키워서 집사 만들기, 장로 만들기... 그거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영역에 나가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높이는 승리자들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 교회는 성도들을 훈련시켜 내 교회에서나 충성스런 교인 만들기를 하는 것일까? 아니지 않는가.

진정한 신앙인의 삶이란 기독교 진리를 바탕으로 한 모든 영역에서의 삶을 말한다. 교회, 가정, 동네, 직장, 사회 그리고 이 지구촌 안의 세계인으로서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네 교육 훈련은 신앙의 기본에서 출발하여 교회에 까지 온다. 그리고는 거기서 멈춘다. 아니 거기에만 집중되어 있다. 즉 우리는 내 교회 교인 만들기에만 열심을 내고 있는 형국이다.

‘이 교회에 뼈를 묻고 목사님을 위해서는 죽을 수도 있는...’ 내 교회 열성분자를 만드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제자 만들기인가?

진정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들려는 것일까, 사람의 제자를 만들려는 것일까. 주님의 사람이기를 원하는가 목회자의 사람이기를 원하는가.

지금은 사사시대와 방불하다. 이단 교주만 이단이 아니다. 교인 수만 늘 수 있다면, 가시적 교회 성장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는 목회자라면 가히 이단교주와 다를 바 없지 않겠는가.

경험적 고백이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을 ‘교회의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교회에 충실한 교인 만들기에 생각이 집중하게 되어 있다.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고 교회 내 모임에 충실하고 교회 봉사를 모든 것에 우선하도록 가르치려한다. 그리고 거기서 한걸음 더 나가 사람들을 교회로 데리고 오는 역할까지만 강조한다.

그래서 근자에 인기를 얻는 훈련 과정들은 바로 새로 들어온 신자를 속성 양육하여 전도하게 만드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에도 부합하고 ‘정체의 늪에 빠진’ 교회를 구하는 명분 있는 훈련이 아니던가. 더구나 갓 세상에서 들어 온 사람의 교제권이 더 비신자들과 가깝고 그로 인한 전도의 효율성이 저들 새신자에 있음에랴.

그러나 여기에 고민이 있다. 도대체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인가?? 한 사람이 온전한 성도로 세워져 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답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병아리가 부화하려면 반드시 알속에서 21일간 따뜻한 보호를 받아야 한다. 만일 하루라도 일찍 새끼를 꺼내면 그 병아리는 죽고 만다.

신자가 신자로 구실한다는 것이 단지 정형화되고 속성화 된 어떤 과정으로 가능한가?

우리는 민족적 성향으로 조급한 면이 있다. 목회자들도 교인들이 그렇게 급성장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들판의 벼가 익는 데에도 과정이 있고 시간이 필요하다. 여름날의 뜨거운 폭양도 필요하고 배아기의 풍요로운 비도 있어야 한다. 어찌 몇 주 만에 제자가 되며 그것도 지루하여 단 수개월 만에 사도가 될 수 있는가.

구원과 성화에 탁월한 설교가인 박영선 목사는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구원 받고 은혜 받은 자가 신앙 생할의 영역을 제한시키는 것을 경고하며 “일주일에 전도 두 번하고 성경 열 번 읽고 하는 식으로 절망이 필요 없는 것으로 자신의 잣대를 스스로 만들어서 안심하시면 안됩니다. 성화라는 것은 그것보다 훨씬 우리 본질의 깊은 데를 꿰뚫어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외면하고 혼자 살려는 마음을 제거하는 싸움입니다”.

어떤 깨달음의 한 조각을 붙들고는 난 이제 알았어 난 전도하러 갈거야 그러며 뛰어나갈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칼 윌슨이 정리해 본 ‘신앙 성장 과정’은 다음과 같다.

1단계 회개와 신앙

2 그리스도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

3 전도훈련과 은사의 감사

4 지도자 양성과 하나님의 감독

5 재평가와 분리

6 참여와 파견

7 변화된 삶과 범 세계에 대한 도전.

윌슨의 정리로도 모든 것을 다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분명한 명제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사람이 돼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가 그리스도의 참 제자인가?

모여서 성경 공부만 하는 것을 훈련이라고 생각해도 좋은가? 그건 훈련이 아니다. 기도훈련, 봉사훈련, 영성훈련, 드리는 훈련, 인내 훈련, 전도훈련, 공동체 훈련...이 다 녹아들어야 비로소 훈련일 것이다.

생각 3.

더 심각한 문제를 말해보자.

한국의 개신교는 이제껏 겪어 보지 못했던 최고의 위기를 맞고 있다. 자칫하다가는 유럽의 교회처럼 예배당만 덩그라니 남고 교인들이 없어서 텅텅 빈 교회가 될 급속 조로(早老)의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아직도 생생한 아프간 선교지의 사건을 기억한다. 우리 교회들에게는 너무도 절박하고 곤혹스러웠던 시간들이었다. 선교의 가치를 내려놓을 수 없는 우리들 앞에 세상이 쏟아낸 비난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다. 거기서 목숨을 잃은 순결한 피의 가치에 대해서는 언급조차도 하기 힘들었던 시간들이었다.

어안이 벙벙할 만큼 터져 나왔던 세간의 비난들, 신문과 방송에서 무차별 쏟아내던 교회에 대한 비판들... 마치 온 대한민국이 나서서 교회를 배척하는 것 같은 형국이 전개되었었다. 사람들은 이것이 서서히 축적되어 온 안티 기독교의 표출에 불과하다고 입을 모았다.

우리 개신교는 100년 역사 속에서 이 땅에서 핍박은 받은 적이 있으나 요즘처럼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어 본 적은 없다. 핍박을 받는 것과 욕을 먹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교회는 핍박 받을 때 힘들지만 오히려 성장하고 순수해 진다. 그러나 욕은 그와 다르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욕을 먹게 되기 시작하면 교회는 몰락하게 된다.

우리 한국 개신교회는 지금 후자의 문제 앞에 서 있는 듯하다.

인터넷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른다. 교회를 ‘집단’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기독교에 대하여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이다. 기독교 최고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세상은 더 이상 우리 기독교를 존중하지 않는다. 신뢰하지도 않는다. 건축 관계 공직자의 말에 의하면, 교회당은 술집등과 더불어 주민 혐오시설로 분류되고 있다.

세상은, 교회와 교인들이 나라와 세상에 대한 소명감을 잊어버리고 자기 집단에만 집중하여 자기만 생각하고 아는 이기적인 집단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자, 그럼에도 교회는 어떠한가? 안타깝게도 그저 교회 안의 일에만 신경을 쏟고 있다. 내 교회에 충실한 교인을 만들어 내는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다. 사회봉사를 해도 치레수준을 벗어나기 어렵고 또 눈에 뜨게 의도적이다.

세상 사람들은 전도를 교회가 세 불리기를 하는 것으로 본다. 길거리를 시끄럽게 하는 무례한들이라고 본다.

아! 우리들의 교회는 ‘자기들만의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비아냥한다. ‘교회? 너나 잘 하세요’.

수년전에 실시한 한미준-한국갤럽 리서치의 결과는 현대사회의 윤리문제 등에 있어서 신자와 비신자간에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나아가 교회에 대한 세상의 이미지는 부정적이라고 지목하였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 세상 속에서 교회가 보여야 할 최고의 가치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제자를 양육하는 일을 잊고 있다. 조지 바나(George Barns)는 미국 기독교의 실패를,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2008년 봄, 세계화 시대의 신 7대 죄악을 교황청이 선정하여 기관지 ‘로세르 바토로 로마노’에 발표한 바 있다. 멈출 수 없는 세계화의 결과로 등장한 새로운 이슈들에 주목한 결과였다. 환경파괴, 윤리적 논란이 되는 과학 실험, 유전자 조작이나 배아훼손, 마약거래와 투약, 소수의 과도한 축재, 낙태, 아동 성범죄..

기존의 7대 죄악은 6세기 교회의 그레고리 1세가 정리한 것으로 정욕, 탐식, 탐욕, 나태, 분노 시기 교만 등이었다. 그런데 세상의 변화를 보니 그 죄악의 흐름도 바뀌었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주목할 부분이 있다. 그들이 붙들은 것은, 세상은 바뀌고 있고 교회는 이에 대처해야 한다는 점이다.

생각 4.

한국 사회는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진 사회이다.

한국의 교회에도 이 면에서는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소위 대형교회들의 상황과 중소형 교회들의 상황은 천양지차이다.

물론 서울과 지방 도시 그리고 농어촌 교회의 상황은 이루 말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어찌 획일화된 교육과 훈련을 말할 수가 있겠는가.

자, 대형교회들은 어떠한가. 교인들을 위한 다양한 훈련과정을 상설할 수 있다. 교인들은 자기의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훈련 내용들을 선택할 수가 있다. 이 시대 속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다양한 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다. 예컨대 직장인 학교, 선교 훈련과정, 결혼 예비학교, 아버지 교실, 어머니 교실, 찬양학교, 각종 전도훈련, 중보기도학교, 성경 통독학교, 크로스웨이, 벧엘... 그리고 자체 개발한 과정들.

그러나 한국교회의 상황은 어떠한가. 한국 교회의 70%가 100명 미만이며, 재정적인 미자립 상태이고, 한국 전체 교회의 80%는 성인출석 200명 미만, 90%는 성인출석 300명 이하의 교회이다.

그렇다면 저들 80%, 혹은 90%의 교회에서는 그러한 다양한 훈련 과정들을 병설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소수의 교역자가 다양한 훈련 과정을 감당하기가 어렵고 더구나 지속적으로 훈련 받을 자원을 찾아내기란 더더욱 어렵다. 결국 만들어보아도 그게 유지될 확률은 거의 없다.

이 평신도 훈련 과정에서 지향하는 바는 분명해졌다.

기왕에 어렵게 소집되는 훈련 과정에서 성도들의 삶의 필수 부분들을 다루어야 한다! 이때에 다루어지지 않으면 거의 다시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이 62주 과정 내에서 모든 주제들이 ‘심도 있게’ 다루질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기본 핵심은 짚으려 하였다. 이 과정을 지나면서 이런 주제들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준거를 제공하려 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터치는 그러한 제 영역에 대한 성경적 삶에 대한 갈증을 성도들에게 심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래 이 교재가 원래 지향하는 대상은 ‘중소형 교회’를 위함이었다.

또한 내용의 난이도를 낮추었다. 분량도 줄였다. 서울 뿐 만 아니라 지방 혹은 농촌의 교회에서도도 그렇게 힘들지 않게 사용할 수 있도록 고심하였다. 공부와는 남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

사랑하는 동역자여,

우리는 신자인지 아닌지 정체가 모호한 상태로 교회만 드나드는 이들을 그냥 방관할 수가 없다.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걷는 믿음의 증거가 확실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지향하자. 교회와 가정과 사회 속에서 향기가 나는 균형 있는 성도들을 꿈꾸자. 열매로 그 나무를 알진대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과 그 행함이 어우러지는 감동을 주는 증인들을 양육하자.

 

 

 

 

 

 

 

 

 

평신도는 목회자의 보조인이 아니다

 

제자 훈련의 한계와 평신도의 선교적 사명

 

입력 : 2010년 09월 27일 (월) 22:01:38 [조회수 : 1268] 한국일 (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

 

한국교회는 교회 영역뿐만 아니라 사회와 민족, 세계 속에서 봉사할 그리스도인들을 길러 내야 한다.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 가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 중심에 세상 속으로 날마다 파송받는 '평신도'들이 있다. 지금까지는 사회에서 교회의 사회봉사 활동을 언급할 때 매우 중요한 단위인 평신도의 역할에 대하여 많이 주목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교회의 사회봉사를 대부분 교회 차원(개 교회, 교파)에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봉사는 교회 차원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 영역에서 실천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개인적, 그가 속한 사회적·직업적 차원에서 실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대부분 교회의 사회봉사는 개 교회 단위 혹은 교단 차원에서의 봉사 활동이었다. 개 교회는 자신이 속한 지역 사회의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고, 노회나 총회는 보다 넓은 차원에서 사회의 어려움에 접근한다. 교회의 사회봉사는 교회 이름으로, 교회의 단위로 봉사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교인들은 각자의 헌금을 통해 사회봉사에 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 교회가 특별한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돌아볼 때 함께 참여하기도 한다.

사회봉사를 위한 자원, 그리스도인

교회적 차원에서 사회봉사를 수행하는 것이 매우 훌륭하다. 그러나 교회가 사회봉사를 위해 가진 또 다른 자원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들은 매일 사회의 전 영역에 흩어져 활동한다. 우리가 봉사의 개념을 현재 교회가 하고 있는 프로그램을 통한 활동 외에, 사회 전반에 속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활동을 통한 하나님나라를 실현하는 봉사 활동을 지향한다면, 그 영향력은 가히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지대한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회봉사 활동을 언급할 때 각각의 그리스도인의 직업적 소명의 관점에서 봉사 활동을 논하고 이것에 신학적, 선교학적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최근에 한국교회에는 평신도의 재발견에 대한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교회를 계급 구조에 기인하여 평신도에 대한 목회자 우위적 인식을 교정하려는 것이다. 개신교는 가톨릭교회의 계급적 구조를 일신하고 만인 제사장직을 통한 평신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한국교회에서는 다시 그것을 반납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러한 전통적 구조에 대한 비판과 개혁 교회의 정신을 회복하여 평신도의 본래적 위치를 찾으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다. 평신도는 목회자에게 종속된 자가 아니라 목회자와 동등한 협력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다양한 은사들을 부여받았다.

한국교회에서 평신도에 대한 재발견을 시도한 사람은 <평신도를 깨운다>의 저자인 고 옥한흠 목사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목회 철학에 바탕을 둔 목회 경험으로부터 평신도를 동력화하는 책을 저술하고, 20년 이상 평신도 세미나를 인도했었다. 고 옥한흠 목사는 어떤 교회보다 평신도의 역할을 인정하고, 교회 안에서 목회자의 파트너로서 순을 맡기고 교회 성장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도록 해 왔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소외되었던 평신도에 대한 관심을 유발하고 교회 내에서 잠자고 있는 평신도를 깨워,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사역의 장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목회자는 교회 내의 계급 구조와 목회자 우월 의식을 지양하고, 평신도를 자신에게 종속된 위치로부터 해방시켜 교회의 주체로서 사명을 수행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신도를 깨우는 것은 교회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책은 평신도를 깨우고 훈련하기 위해 제자화를 추구한다. 목회자는 평신도를 철저히 제자로 훈련하여 목회자와 동력하는 일군으로 양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는 내부적인 사항-예배, 기도, 모임, 경건 등-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본래적 사명, 사도적 교회로 전환해야 한다. 그것은 곧 모든 평신도들이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의 사도적 책임을 곧 선교로 이해하면서 이것이 그의 책의 전체 주제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내용을 분석하면 몇 곳에서 평신도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지만, 평신도 지도력은 전반적으로 교회의 소그룹을 인도하는 소그룹 지도력, 신앙을 상담하는 영적 지도력, 순원들의 인격과 가정생활 혹은 사회생활을 돌아보는 목회적 지도력 등 교회 내부적 활동에 국한되어 있다.

한국교회가 목회자 중심으로 움직일 때 고 옥한흠 목사는 누구보다 먼저 교회 내의 평신도의 자원에 주목했다. 그들을 목회자의 파트너로 인식하고, 제자로 훈련하여 목회자와 동력할 수 있도록 평신도의 지도력 향상에 심혈을 기울였다. 지난 20여 년 동안 그의 평신도 운동이 가져온 건전한 교회 성장과 영향력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

한국교회에서 전개되고 있는 평신도 운동의 성격을 평가해 보면 고 옥한흠 목사의 평신도 운동을 비롯하여 최근에 한국교회 내에 전개되고 있는 대부분의 가정 교회 운동들은 아직 교회 내부적 차원 즉 목회 영역에 머물고 있다. 리더십과 관련하여 과거의 목회자 중심의 목회 구조를 탈피하고 평신도가 은사와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도록 활동의 장을 마련하고 있으나, 그 모든 것은 한마디로 평신도의 제자 훈련이라는 범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평신도 운동이 한국교회의 평신도의 잠재력을 일깨우고 은사와 리더십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이 크지만, 이런 운동이 지닌 근본적 한계는 평신도에 대한 이해와 교회론, 선교 이해에 있어 아직 편협하고 편향적 인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고 옥한흠 목사의 평신도 운동은 한국교회 내에서 전개되고 있는 운동 중 가장 신학적이며 체계적인 운동이지만, 그 특성은 교회 내 소그룹 운동을 벗어나지 못한다. 인격은 개인적 인격이며 사회 변화는 개인 윤리적 차원, 리더십은 소그룹 인도하는 능력에 제한되어 있다.

이제까지 한국교회 내에서 전개되어 온 대부분의 평신도 운동은 교회 내부적 차원과 관련된 평신도 활동과 동력화와 리더십에 그친다는 점이다. 평신도를 활용한다고 할지라도 그 목회 패러다임이 교회 내부 지향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평신도를 목회자의 동역자로 간주하는 목회 철학 역시 교회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교회 내부 지향적 리더십이다. 교회의 사도성을 실현하는 선교 이해 역시 말로 증거하는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교회 성장을 지향하는 평신도 운동

무엇보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전개되고 있는 대부분의 평신도 중심의 운동과 목회 패러다임은 교회 성장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목회자 중심에서 평신도 중심으로, 평신도의 자원과 은사·능력을 활용하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있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교회 성장을 위한 전략에 그치고 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평신도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운동이 교회의 범주 내에 제한되어 있으며 그 이면에는 교회와 세상의 대립 구조를 극복하지 못한 이원론적 사고와 교회 성장과 그것을 위한 평신도의 동력화라는 문제이다. 더불어 실용적 사고가 자리하고 있어 대부분의 평신도 운동과 동력화는 교회의 목회 활동과 성장을 위한 목회적 역량과 지도력에 있어 목회자의 보조자 위치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에서 진행되는 평신도 운동은 작은 목회자를 양성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무리 선교를 강조해도 교회 중심적 선교 패러다임(church centered mission)을 넘어서지 않는 한 평신도의 모든 활동은 교회 내부적인 것이다. 교회는 내부 지향적 특성에 머물게 된다. 교회가 평신도의 소명에 관하여 언급할 때 대부분 교회 안에서의 활동과 전도 활동에 국한된다. 세상 속에서 수행하는 직업적 소명과 그들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무지하거나 있다고 해도 매우 소극적 차원에서만 다루고 있다.

교회가 세상 안에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목회자와 평신도의 상호 협력이 필요하다. 평신도 사역의 필요성이 교회 내에서의 평신도 지위의 고양이나, 목회자의 바쁜 목회 사역의 분담을 위해 요청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교회의 진정한 존재 의미와 선교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평신도 사역이라는 말은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온 교회가 동참하는 특권'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평신도의 '일과 소명'에 관한 교회의 후원이 필요하다. 평신도가 속한 모든 직업이나 전문 분야에서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교회는 내부에서 행해지는 교육과 훈련에서 복음을 개인의 경건 생활, 가정생활 또는 인간관계에 적용하는 것에 비해 복음을 그리스도인들 각자가 속한 사회의 각 분야에서의 직업과 그 전문 분야에서 적용하려는 노력은 매우 부족하다. 평신도는 자신의 진정한 소명에 근거한 사역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열심과 노력의 대부분은 종교적 범주에 머물고 있다. 세속적 관점에 무의식적으로 길들여져 있다.

평신도는 교회와 세상이 분리되지 않도록 다리를 놓는 사람

세계교회협의회는 평신도 사역은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온 교회가 동참하는 특권을 표현하고 있다고 천명한 바 있다. 교회의 사회봉사적 역할은 바로 이러한 평신도들의 소명 의식을 일깨우고 그들의 묻힌 은사들이 개발될 때 바르게 실현될 수 있다. 이들의 관심이 교회 안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자신과 같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필요와 관심을 발견하게 될 때 교회의 선교 사역의 방향을 결정하고 제시할 수 있다.

평신도는 교회와 세상이 분리되지 않도록 다리를 놓는 사람들이다.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교회 밖, 세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게 하는 통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교회는 이러한 평신도에 대한 신학적 이해(교회론, 선교론, 평신도론 등)를 기초로 하여 하나님이 주신 풍부하고 다양한 자원들을 발견하고 개발하여 전문화할 책임이 있다. 그래서 이들이 이웃과 사회를 위한 봉사자로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이제까지 한국교회 내에서 전개되어 온 대부분의 평신도 운동은 교회 내부적 차원과 관련된 평신도 활동과 동력화와 리더십에 그친다는 점이다. 평신도를 활용한다고 할지라도 그 목회 패러다임이 교회 내부 지향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평신도를 목회자의 동역자로 간주하는 목회 철학 역시 교회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교회 내부 지향적 리더십이다. 교회의 사도성을 실현하는 선교 이해 역시 말로 증거하는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교회가 세상 안에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목회자와 평신도의 상호 협력이 필요하다. 평신도 사역의 필요성이 교회 내에서의 평신도 지위의 고양이나, 목회자의 바쁜 목회 사역의 분담을 위해 요청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교회의 진정한 존재 의미와 선교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평신도 사역이라는 말은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온 교회가 동참하는 특권'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평신도의 '일과 소명'에 관한 교회의 후원이 필요하다. 평신도가 속한 모든 직업이나 전문 분야에서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가 섬기는 공동체로서 세상에 보내졌다는 것은 '교회 구성원 모두가 세상을 섬기도록 보내졌다'는 의미가 있다.

"평신도들은 그들의 선교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기본적으로 교회 조직 내부에서의 봉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주로 일상사와 공공 봉사에서 그들의 전문적 기술과 능력을 사용하는 방법들을 통해서 두드러지게 표현한다." (<교회의 직제와 평신도론> 중)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투쟁의 장은 세상

목회자의 사역의 장이 교회라면 평신도의 활동의 장은 세상이다. 복음이 모든 삶의 영역을 위한 것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신앙의 투쟁과 하나님나라의 실현과 확장은 바로 사회의 다양한 영역(공장, 가게, 사무실, 농장, 정당, 정부 기관, 학교, 가정, 언론 매체, 연예가, 국가 관계 등)에서 발생한다. 교회가 이런 영역에 들어가는 것은 곧 평신도 개개인을 통해서 가능하다. 평신도가 아니면 교회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접촉할 방도가 없다. 그러므로 교회가 선교적 과제와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목회자와 교인 간에 협력 관계가 잘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교회 교인들이 지니고 있는 선교적 역량을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종교적 행사에만 활용한다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라는, 즉 세계 안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실천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나라는 교회 안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님나라의 지표로서 세상 속에서 가시화하는 일은 평신도의 구체적인 참여를 통해서 실현된다.

교회는 신학적으로 평신도가 단지 목회자의 보조 역할의 수행자가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위한 목회자의 동역자로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인식하고 재능을 발휘하도록 인도해야 한다.물론 평신도가 자신의 직업적 소명을 세상 속에서 실현하려고 할 때 필연적으로 많은 갈등에 부딪히게 된다. 또한 오늘날과 같이 고도로 조직화된 산업 사회 속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문제들에 대한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분별하기란 용이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여전히 사회의 제도나 구조적 문제를 외면하고 개인의 윤리적 책임만을 언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회 속에서 올바른 직업윤리와 소명의 실천을 위해 교회는 직업적 소명에 대한 전문 연구기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개 교회의 목회자 역시 평신도들의 소명의 장인 현대 직장 사회에 대한 이해를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직장에서 지치고 피곤한 성도들을 말씀으로 격려하고 지지해 주어 새로운 힘을 얻도록 해야 한다. 교회가 평신도들이 세상을 직면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의 도피처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교회가 자랑할 만한 것 중에 하나는 세계 교회에서 쉽게 발견하기 힘든 높은 수준과 신앙의 열정과 봉사의 정신을 지닌 교인들이다. 이들은 신앙적으로 잘 훈련된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세계 선교에 앞장서서 활동할 수 있는 귀한 자원이다. 이와 같은 풍부한 자원을 교회가 세상을 섬기는 사회봉사 요원으로 활용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 올바른 교회론, 선교론, 평신도론에 대한 신학적·선교학적 근거를 가지고 구체적인 도전과 훈련이 있어야 한다.

한국일 / 장로회신학대학교 선교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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