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레미제라블
딤후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저는 메모를 열심히 하는 편입니다
망각을 잘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머릿속을 스치는 멋진 생각들을 꼭 챙겨두고픈 욕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 모임에 갈 때는 볼펜과 쪽지를 호주머니에 넣고 갑니다. 대개의 모임에서는 사람들이 펜을 찾다가는 결국 내게서 빌려가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저는 특히 여행을 갈 때에는 메모를 열심히 합니다. 그게 다 공부이지요.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갔었습니다. 다들 처음에는 가이더 말을 들으며 열심히 메모를 하더군요. 며칠 지나니 포기합니다. 그래도 저는 계속했습니다.
자랑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이런 습관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설교를 들을 때도 그렇습니다. 다 기록할 필요 없습니다. 적어도 내 심령에 다가오는 말씀들은 메모를 해야 합니다. 다시 집에서 되새김하십시오. 그러면 내 양식이 됩니다.
근자에 한 영화를 봤습니다. 레미제라블.
일부러 시간을 냈습니다. 거금을 투자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와서는 곧장 글을 썼습니다. 영화의 감동을 넘어서 어떤 깨달아지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들은 시간 투자 안하고 돈 투자 안하시고 그 명작 영화를 만나게 됩니다.
수지 맞았습니다~
명작 레미제라블
여러분 중에 이미 오래 전에 그 책을 읽은 분들이 있으리라 봅니다.
우리나라에는 장발장이라는 이름으로 나왔습니다.
저 역시 중학교 시절에 그 책을 읽으면서 가슴 떨린 감동을 받았습니다. 며칠 동안이나 그 줄거리를 되뇌이며 지냈습니다.
저자는 빅톨 위고라는 프랑스 작가입니다. ‘노틀담의 곱추’도 그의 작품입니다.
레미제라블은 그가 반평생을 바쳐 완성한 대작입니다.
60세 즈음에 완성되었는 바, 한 사람의 작가로서의 성숙한 인생관이 농축된 작품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이 영화는 음악으로 만들어진 소위 뮤지칼극입니다.
대사가 거의 없이 90% 이상이 노래로 형성됩니다. 그것도 배우들이 립싱크한 것이 아니라 라이브입니다. 영화 역사상 최초로 시도된 라이브 녹음으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자, 우리는 그 영화의 형식을 여기서 논할 이유가 없겠습니다.
우리는 거기 담긴 내용과 의미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것은 작의 신앙 고백이자 독자에 대한 엄숙한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어둡다
시대적 배경으로는 프랑스 대혁명 직전의 혼란기입니다. 어느 시대나 혁명 전후는 혼란스럽습니다.
원래의 제목은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인데 "불쌍한 사람들" “비천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제목처럼 이 영화에는 가난한 사람들, 비천한 사람들, 거리를 방황하는 사람들이 비춰집니다.
시민 혁명군도 장발장도 여직공 판핀도 아이 코제트도 세상 밑바닥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미천하고 천한 삶을 이 영화는 가득 담고 있습니다. 화면이 전체적으로 어두운 느낌을 주는 것은 그런 연유가 아닌가 합니다.
성도 여러분, 아담이래로 이 지구상에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도 전쟁이 있었습니다. 신음 소리가 있고 질병이 있습니다. 압박하는자와 탈취 당하는 자들이 있어왔습니다.
이 영화에서처럼 전과자의 새 삶의 기회를 외면하는 차가운 이웃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직공들을 착취하는 악덕자가 있습니다. 거리의 여자로 내몰린 사람을 짓밟는 남자들 이 있습니다.
전4:1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학대, 학대..눈물, 눈물. 서글픈 세상입니다.
그런 배경 가운데서 등장하는 장발장은... 마을의 날품팔이 노동자입니다. 근근히 살아가는 신세입니다. 그런데다 그는 홀로된 누이동생과 그 아이들을 부양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굶주린 조카 딸 아이를 위해 빵을 훔힙니다. 체포되었고 형수소에 수감됩니다.
한순간의 실수로 그의 생은 낭떨어지로 떨어져 갑니다.
그들은 크리스천?
어려분 이것 아십니까?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영화가 크리스천들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거기 배역을 맡아 나오는 인물들 대다수가 크리스천입니다.
감옥살이 후 새롭게 거듭난 장발장, 비운의 여직공 판틴, 법을 무조건 믿는 법치주의자 자베르, 판틴의 딸이자 장발장의 양녀인 코제트, 돈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마다하지 않는 여관집 부부, 혁명을 위해 싸우는 청년 마리우스 등...
그들의 마음을 담은 소원은 노래가 되어 들려집니다. 그 수많은 노래는 주님을 향한 탄원과 간구로 형성됩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지만 각자의 사는 방식은 다릅니다.
적어도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변질된 가짜입니다. 입술의 신앙과는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둘을 예를 들겠습니다.
먼저여관을 경영하는 부부. 그들은 불쌍한 꼬젯트를 맡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코젯을 하녀로 부려먹으며 교묘하게 학대합니다. 양육자 장발장이 나타나 아이를 데려가려하자 그 부부는 코젯을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립니다. 가짜 눈물이지요. 슬픔을 가장하며 결국은 돈을 챙기는 수를 씁니다.
그들은 시민 혁명이 발발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정의를 위해 죽어가는 현장에도 나갑니다. 거기서도 보석을 챙기려 동분서주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자베르 경감입니다. 영화 전체에 걸쳐 긴장감을 주는 인물입니다 .
그는 가석방된 죄수 장발장이 사라지자 집요하게 추적을 하는 형사입니다.
신과 법의 이름으로 법을 집행하려는 자베르... 그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냉혹함을 섬뜯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는 원칙과 법이라는 냉정한 잣대만을 들고 삽니다.
자베르는 장발장이 처한 억울한 형편과 상황, 그의 진실한 고백을 전혀 듣지 않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너 같은 인간을 잘 안다”. 그러나 과연 그는 아는 것일까...
주목 할 점은, 그의 장발장에 대한 호칭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장발장을 ‘죄수 24601번’으로 부릅니다!
장발장이 변화되고 시장이 되고 존경받는 사회인이 되었지만 자베르의 눈에는 오직 24601번 죄수만 보입니다.
그러나 장발장은 그 자베르에게도 용서를 실천합니다! 혁명군에 잡혀서 죽음의 위기에 놓인 자베르를 빼내고 생명을 구해줍니다.
결국 자베르는 법과 원칙만을 신봉하던 자신의 삶에 대해 회의를 느낍니다. 그러나 자기 신념보다 더 거대한 원리인 사랑의 삶을 받아들이는 대신 세느강에 몸을 던집니다. 자살로 마감합니다.
여러분! 냉혹한 자베르 경감도 크리스천이었습니다. 돈만 탐하던 여관집 주인도, 못 이룬꿈을 아파하며 쓸쓸하게 병상에서 죽어가는 판틴도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각각의 노래로 기도로 신을 부릅니다.
그들의 판이한 얼굴에서 우리는 이 시대의 신자들을 봅니다.
크리스천으로서의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왜 한 하나님 아버지를 섬긴다는 사람들이 다를까... 달라도 그토록 다를수 있을까.
여러분 보십니까. 우리 주위에도 얼마나 많은 자베르가 있는지... 우리 주위에도 얼마나 많은 여관집 주인들이 있는지... 자신의 신앙과 상관없이 물질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 원칙과 법을 신앙처럼 주장하며 자비를 잃은 사람, 기독교적 가치를 상실한 채 자기만의 신념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
사람은 변할수 있다
자, 이런 고민을 하면서 우리는 이러한 대 명제 앞에 서게 됩니다.
사람은 과연 변화할 수 있을까? 사람은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여러분 인간 이해론에서 이것보다 큰 주제가 있을까요?
악인이 선인 될수 있는가? 잔인한 자가 자비로운 자가 될수 있는가? 죄인이 의인 될수 있는가?
구약 예레미야서를 봅시다.
렘 13:23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무슨 말입니까? 흑인은 자신의 피부를 희게 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표범은 그 털의 얼룩을 지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 악인은 스스로는 선한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선언입니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사람의 실체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말합니다. 사람은 변화될수 있다! 죄수가 성인될수 있다!
바로 주인공 장발장이 그런 사람입니다.
인생의 날을 살아가면서 주인공은 종종 독백합니다. Who am I?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왜? 장발장 자기 자신도 상상 못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도 혼란스러울 만큼 달라진 자신을 보며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본래 장발장은 죄수입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틈만 있으면 탈옥을 시도합니다. 그로 인해 형이 19년으로 연장됩니다. 절망과 분노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때가되자 석방되어 사회로 나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은 죄수요 죄인입니다. 그는 사회에 대한 분노와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을 품은 사람입니다.
장발장은 허름한 옷차림과 피곤에 찌든 몰골로 거리를 배회합니다. 누구도 따뜻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그가 전과자라는 소문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 음식과 잠자리 제공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 우리 역시 사람에 대밤 그는 순간적인 충동을 이기지 못하여 도둑으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거실의 은접시를 훔치게 됩니다. 그리고 문밖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이튿날 아침, 경찰에게 붙들린 장발장은 신부님 앞으로 끌려옵니다. 여기서 그는 끝장날 것입니다. 다시 감옥으로 끌려가 평생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밀리에르 신부는 경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훔친 것이 아니요. 그 은접시들은 내가 그에게 준 선물이요’
신부는 덤으로 은촛대까지 내줍니다., 장발장은 사랑의 폭탄을 맞은 것입니다.
경찰이 돌아간 뒤 영혼의 충격을 받고 서있는 장발장에게 신부는 말합니다.
'정직하게 살아가게 그대의 영혼은 내가 사서 하나님께 바쳤다네' .
자,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묻게 됩니다.
장발장은 그 후 변화되었을까요? 새사람 되었을까요? 영화는 말합니다. 그렇다!
예수님은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무는 그 열매로 보아 알 수 있다.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를 알수 있다!
마7: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열매는 행실이요 그의 삶입니다. 열매는 그의 언어와 행동입니다. 그 열매는 그의 신앙의 진실한지 아닌지의 가름대입니다.
장발장에게는 그 열매가 있을까요?
세월이 흐르고 마드렌느라는 새 이름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바로 장발장입니다.
그는 이름만 바낀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바뀌어 있습니다. 그는 자비하고 따스한 사람입니다. 그는 친절한 공장 주인이요 또 존경받는 시장입니다. 더 이상 그는 죄인 장발장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진행 순간순간 주인공은 독백처럼 되뇌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외침은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확인하는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아닐까요? 우리는 삶의 순간순간 자문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요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재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삭막한 직장생활 중에도 수시로 물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무미건조하기 쉬운 가정의 삶에서도 물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무신론의 분위기가 팽배한 사회생활 중에도 물어야 함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새 피조물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사람은 스스로 변화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어떤 방도로 새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가능한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말하기를 ‘내가 곧 그 길이라..’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람은 그 길을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 이정표가 있어야합니다. 누군가가 보여줘야 합니다.
장발장은, 그는 어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는가? 누가보여 줬는가? 밀리에르 신부! 그가 주님을 보여줬고 주님 앞에 세웠습니다.
고후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후2: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칭찬하며 말합니다.
우리로 인해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향기라!
향기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 냄새 맡는 자를 궁금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디서 이 향기가 오는 것일까? 그 꽃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꽃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꽃은 그리스도요 우리는 그 향기입니다!
최고의 향기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입니다. 그냥 크리스천이 아니라 예수의 사람입니다.
이제 장발장의 모습은 가히 작은 예수입니다. 죄인이었던 그는 이제 성직자 같습니다.
그 잔혹한 시대에 자비를 실천합니다 그 분노가 들끓던 사회에 용서를 실행합니다. 남을 위해 희생을 감당합니다. 그런 삶을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질병으로 죽어간 여직공 판틴의 딸 코제트를 마치 소명처럼 받아들입니다. 이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 바치는 모습은 감동입니다.
심지어는 자신을 추격하는 자베르에게 까지 무제한의 용서를 베풉니다.
이것은 초라한 인간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까지 하는 예수님의 냄새아닐까요!
복수를 치료하는 것은 용서입니다. 무관심을 덮어버리는 것은 자비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힘입니다.
어둠을 밝히는 촛불 아시지요? 우리는 때로 촛불 예배를 드립니다.
촛불이 분화되는 모습이 감동입니다. 촛불은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또 저 사람은 그 뒤의 사람에게로... 그 촛불이 하나씩 하나씩 많아져가는 것은 감격입니다. 점점 더 어둠은 사라져 가고 점점 더 빛은 넓혀져 갑니다.
이것을 은혜의 릴레이라고 합시다.
이 영화는 그 릴레이를 보여줍니다. 이 은혜의 릴레이는 밀리에르 신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장발장에게로 가고 코제트 소녀에게로 가고 심지어 자베르에게로 다가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놓쳐서 안될 것이 있습니다! 밀리에르 신부는 누구에게서 그 촛불을 받았을까? 예수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 이제 그 빛을 이어받은 자들을 통해 세상을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밀리에르 신부는 그 촛불을 장발장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다 외면하는 죄수를 영접했습니다. 그의 도죽질에도 더 큰 용서를 주었습니다.
교회당 담 밖에는 착취와 증오가 넘실대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당 담 안에는 사랑, 긍휼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교회가 그럴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우리 각자가 그런 촛불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 사랑의 릴레이를 계속 해야 합니다. 오늘 누군가에게 그 일을 해야 합니다.
내세가 현실로
이 영화의 마지막은 주인공의 세상을 떠남입니다.
주인공은 믿음직한 청년 마리우스에게 꼬제트의 장래를 맡기고 조용히 사라집니다.
정말 숨가쁜 일생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초연하게 떠나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청년 마리우스는 장발장에 대한 사회적 오해를 알게 되고 더구나 그가 자신의 생명을 구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마리우스는 코제트와 함께 장 발장을 찾아옵니다.
수도원에서 임종을 맞는 장발장, 그는 사랑스런 코제트와 청년의 손을 잡고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런데 이 임종 장면을 이 영화는 독특하게 다룹니다.
주인공은 일생의 사명을 다한 모습으로 의자에 앉은 채 임종을 맞을 때, 그의 영혼은 내세에 발을 드려놓게 됩니다.
벤치에 있는 주인공과 그를 에워싸고 있는 살아있는 자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투영됩니다.
반면에 영원 세계를 들어서고 있는 그의 영혼은 실제 세계처럼 선명하게 클로즈업됩니다.
저는 이 마지막 장면에서 가슴을 울리는 전율을 만났습니다.
아, 바로 저것이다! 모든 사람은 그 날이 오면 이 현실 세계가 꿈과 같은 희뿌연 잔상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현실인 영원 세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성도 여러분 이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 소망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현세를 위해 오늘을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날을 위해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끝으로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 영화에 출연한 사람들이 큰 상을 받았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지난 1.13일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제70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이 미국 LA에서 열렸습니다.
(저는 바빠서 가보지 못했습니다~~).
'레미제라블'은 뮤지컬 부문에서 작품상을 수상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장발장 역을 맡은 배우에게는 남우주연상이 여직공 판틴역을 맡은 배우에게는 여우조연상이 주어집니다.
최선을 다해 열연했던 배우들, 자신의 배역이 충실했던 그들에게 최고의 영예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 영화는 2.40분 상영이었습니다. 그 상영 시간이 끝나니 다들 집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렇듯이 우리의 삶의 시간이 끝나면 다들 본향 집으로 갈 것입니다.
아, 우리의 인생의 날이 다했을 때 우리에게는 각자의 삶은 비로소 판단됩니다.
누가 자신의 배역을 잘 했을까? 해내야 할 삶, 견뎌야 하는 그 인내들을 온전히 이루었을까? 바로 그것입니다.
이 시간 세상 떠날 날을 앞둔 사도바울의 고백을 봅시다.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우리는 각자 신 레미제라블을 몸으로 써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배역을 해내야 합니다.
인류 역사라는 드라마에서 꼭 주인공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각자의 역할을 해내면 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각자는 자신의 삶의 주인공일수 있습니다.
장발장보다 더 감동스런 크리스천의 길을 갑시다.
신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하여 골든 그로브의 수상보다 더 찬란한 금메달을 목에 메는 거룩한 경주자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2013.1.27 주일 설교/ 설교자 이진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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