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이야기

부친 이종철 장로님

johnleejw 2013. 4. 16. 10:43

 

 

 

 

 

 

 

책소개

고훈 · 김광식 · 김기수 등 49명의 목사님들이 소개하는 그 때 그 장로님들의 감동스토리. 살아있는 설교예화인 이 책은 본받을 장로의 표상을 그린다.

    

이 책에 실렸던 나의 부친 이종철 장로님에 대한 글을 아래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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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 목말랐던 사람, 이종철 장로

 

우리나라의 역사 기록을 따라 2001321일을 찾아보면 한 유명인의 사망일을 알려주고 있다. 현대 그룹을 창업하고 국내외 대기업으로 일구어 낸 고 정주영 회장이다.

나는 그의 죽음 꼭 일주일 전 314일에 소천한 한 분을 얘기하고자 한다. 공교롭게도 그 두 사람은 같은 해 즉 1915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같은 해, 같은 달에 세상을 떠났다.

고 이종철 장로는 본래 충남 부여에서 출생했으나 고아처럼 떠돌다 보령에 정착했다.

데릴사위로 그 동리에 들어와 농사짓는 일에 열중하며 살게 되었다. 그러던 중 결혼 12년 쯤 되던 1954, 그는 갑작스런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혀처갓집 외딴 사랑채를 빌려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십자가도 만들어 붙였다.

그의 신앙의 뿌리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목을 잡고 인근 감리교회의 주일학교에 다닌 그 것이 전부였다. 신학교는 커녕 당시 소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그가 단지 성경 한 권을 들고 성령의 강권하심에 따라 교회를 개척하고 주일마다 설교를 하였다는 사실은 놀랍기 그지없다.

 

바쁜 농번기에는 들에서 달려와 수요 저녁 예배를 드렸고 새벽기도회는 일 년 365일 하루 도 거르지 않았다. 그의 설교에는 언제나 뜨거움이 배어 있었고 설교를 듣는 교인들 중에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었다. 만성 질병으로 아픈 자들이 나았고 귀신들린 자들이 치유되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늘어났고 수년 만에 흙벽돌로 된 교회당- 주포 교회-을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전도사 교역자를 모실 수가 있었다. 그 시골 동네의 작은 교회에는 신참내기 전도사들이 주로 배정되어 왔다. 그들의 목회 미숙으로 인한 시행착오는 계속 됐다. 교회의 혼란도 야기되곤 했다. 그 때 마다 이장로는 목회자의 편에 섰고 그 허물을 덮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노라면 교회는 빨리 평온을 되찾곤 했다.

젊은 교역자 전도사는 좀 원숙해질 만하면 목사가 되어 읍내나 좀 더 큰 교회로 떠나갔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교회는 점점 성장하였고 면소재지에서 제법 든든한 교회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장로의 신조는 분명했다. ‘장로는 목회자가 소신껏 목회 할 수 있도록 배려하면 된다’.

교회는 그의 전적 헌신으로 만들어졌고 교인 중의 상당수가 자신이 전도한 사람들이지만, 그는 주일마다 가장 낮게 허리 굽혀 인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교인수가 늘어났고 장로가 여럿 세워졌고 교역자로서 목사가 자리를 잡았다.

농번기에도 목사님의 연락이 오면 비록 보리타작 날이라 할지라도 바로 심방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언제나 뒷처리는 아내 안권사의 몫이 되었다). 특히 강력한 치유의 은사를 많이 경험한 그였지만 목사님이 환자의 머리에 손을 얹을 때 곁에서 환자의 어깨에 손을 얹고 조심스레 기도에 동참하는 처신을 하였다.

 

이 교회가 큰 시험에 휘말린 일도 있었다. 그것은 목회자가 청년 여교사와 함께 사라진 일이었다. 사택에 불화가 잦았다느니 그 여선생이 어쨌다느니... 교회는 술렁이게 되었다. 그 작은 시골 면소재지는 목사 스캔들로 벌집 쑤신 듯했다. 이장로 내외는 이 문제를 일절 입에 담지 않았다. 그저 기도로 쓰라린 마음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교회는 놀랍게도 빨리 안정을 회복했고 사람들은 그 상처를 잊어갔다.

 

사십여년의 역사를 하며, 이제 교회는 튼실하게 자리하고 있었고, 연로한 이장로의 집안 일은 이미 큰 아들 내외가 맡고 있었다. 매일 가정 예배로 키워낸 자식들은 장성하여 각기 흩어졌고 각처에서 신앙의 가정들을 이루었다. 그 동안에도 그는 십리 즈음 거리의 동네에 이단으로 인해 문을 닫은 한 교회를 찾아, 지속적으로 예배 인도함으로 결국 회복시킬 수가 있었다.

그런 그는 생의 마지막 헌신을 주께 드리기로 결정했다. 목사님을 찾아갔다. 등 넘어 관산 동네의 교회 개척을 위해 몇 년간 나가 있음을 허락받기 위해서였다. 이듬해 봄에 이장로 부부는 그 동네로 들어갔다. 뜻을 같이하는 집의 사랑채에 간이살림을 차리고 그 집 텃밭을 빌려 천막 교회당을 지었다. 그리고는 가가호호 전도와 심방을 계속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이렇게 관산교회가 세워졌다.

 

이제 노년에 이른 이장로는 본 교회로 돌아왔다. 이미 원로 장로로 추대되었으나 그의 조용한 충성은 계속되었다. 누구도 꺼려하는 새벽 종 치기를 도맡았다. 종이 챠임벨로 바뀐 후까지 그 수고는 계속되었다. 목청이 좋은 편인 그는 주일 예배 전에 손수 마이크를 잡고 예배 전 찬송 인도도 하였다.

1989년 봄날의 임직식은 주포 교회뿐만 아니라 그의 생에 참으로 의미 있는 날이 되었다.

이날 노인 이장로는 신임 장로로 임직 받는 자신의 장남에게 손수 장로 가운을 입혀주게 되었던 것이다.

일생 동안, 그의 교인들에 대해 주장하지 않는 자세와 목회자에 대한 존중의 자세는 일관되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소천하기 석주 전까지 대표기도에 오를 만큼 건강을 주셨고 그는 강단에 올라 낭랑한 기도를 하였다.

 

이종철 장로... 그는 일생 동안 동네 밖을 멀리 나가보지 못했고 신문에도 나지 못했으며 부유하게 살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는 한 영혼을 사랑하는 주님의 마음을 알아 그 일에 신명을 다했고, 하나님은 그의 63녀 자식들을 책임지어 믿음의 가문의 풍요한 복을 주셨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고후 6:9)

 

삼가 부친 이종철 장로님을 기리며

                           이진우 목사(창성교회 담임, 총신대 강사,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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