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가장 귀한 것
계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계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계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계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계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2: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계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오늘의 설교는 몇 주 전 총신대의 채플에서 행한 내용을 확대시킨 것입니다.
전번 주일에 언급한 바 있습니다. 지난 여름 제가 경험한 좀 특별한 사경회에 참여했다고.
변화의 물결이 소용돌이치는 서울의 한복판에서 마치 한국교회 초기의 모습을 지켜내는 사람들... 그들의 예배에는 거품도 가식도 없었습니다. 인위적으로 분위기를 조성하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성경보고 기도하는 시간 벌기 위해 머리까지 삭발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런 집회, 이런 사람들??
오늘은 그 다음 이야기입니다.
그 집회에 참석한 후 나를 초대한 이와 작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 집회도 좋지만 저는 몇 주 후에 열리는 또 다른 사경회에도 참석합니다. 거기도 여기와 비슷한데 매년열립니다’.
궁금해졌습니다. 아니 거긴 뭐지요? ‘똑같이 이 줄기를 따르는 사람들인데 마포에서 모입니다’
그럼 왜 그들은 따로 모이나? ‘여기서 갈라졌습니다. 양측이 갈등이 나고 결국 분리 한 것이지요 ’
그 날 그의 말 한마디에 제 마음에 찬바람이 일었습니다.
마치 감동의 물결 위에 한바가지 찬물을 붓듯이...
안타까웠습니다. 우리만은 말씀대로 살아보자고 모인 사람들.. 이 시대의 흐름에 저항하면서 싸우면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보자고 모인 이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자기들 끼리 왜 다투는 것입니까? 왜 싸우다가 결국 쪼개져서 따로 살림을 채려야 합니까??
여러분 이게 얼마나 쓸쓸한 이야기입니까?
그러면- 이런 문제의 근원은 과연 무엇일까요?
에베소 교회는
우리는 성경에서 놀랍게도 그와 흡사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주후 90년경.
그리스도는 당시의 한 교회를 향한 특별한 말씀을 하십니다. 에베소 교회여-
당시 이 교회는 당당하고 활기찼습니다.
그러나 10여 년 전에 제가 들렀던 에베소 지역은 그저 쓸쓸한 벌판이었고 거기 폐허가 된 건물의 잔해들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1세기의 에베소는 당시 소아시아 지방에서 가장 흥청거리는 도시였습니다. 마치 우리의 인천과도 같다고 할까요? 육로와 해로의 교통 요지였습니다. 배를 타고 오는 상인들이 많아서 돈이 차고 넘쳤으며 타락한 문화가 왕성한 곳이었습니다.
행 19장을 보면, 바울이 이곳에 와서 처음 복음을 전합니다.
에베소 주민들은 마술 책들을 모아서 불태웠는데 자그마치 은 5만... 그게 에베소의 영적 실태였습니다. 이처럼 당시 에베소는 여신 아데미와 남신 제우스를 치열하게 섬기는 대표적 도시였습니다. 그런 도시 한가운데서 에베소 교회는 건재했고 성도들은 믿음을 지켜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의하면 주님은 이 교회에 아끼지 않는 칭찬들을 주십니다.
그런 도시 안에서 에베소 교회는, 에베소 성도들은 어떻게 지냈는가?
주님은 “내가 네 행위를 안다”고 하십니다. 이는 "내가 네 행위를 보니 과연 칭찬 할 만하구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행함과 믿음은 따로 가지 않습니다.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리도 주님은 "네 수고를 안다"고 칭찬하십니다. 유혹과 쾌락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주를 따르기 위해 이를 악물고 바르게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인내를 칭찬하십니다.
특별히 주님은 에베소 교회가 무엇보다 악을 용납하지 않은 것을 칭찬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우상 숭배의 물결을 싸워 막아냈으며 악한 자들을 물리치고 교회를 지켰습니다. 게다가 자칭 사도라 하는 거짓 사도들을 밝혀냈고 그들의 거짓 가르침이 교회에 침투하지 못하도록 해냈습니다.
그리고 여기 주목할 대목은 주님의 극찬입니다.
주님이 미워하시는 니골라당을 그들도 미워한 것입니다!
니골라당은 당시 소아시아 교회 가운데 세력이 컸던 집단이었습니다.
니골라는 누구인가? 행6장에서 예루살렘 교회에 세워지는 집사 7인을 보게 됩니다. 아마도 거기 맨 마지막에 나오는 사람이 이 니골라 일 것입니다. 그들의 자격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어쩌다가 그 니골라 집사가 교회를 위협하는 집단의 괴수가 되었을까?
얼마 전에 배교자에 관한 설교를 한바 있습니다. 배교는 있습니다.
아마 초대교회의 대표적 배교자중의 하나가 이 니골라일 것입니다. 니골라당은 황제 숭배를 인정했으며 아데미 여신 숭배를 받아들이며 그들과 짝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머물며 그런 행위들을 괜찮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하지만 에베소 교회는 정신 줄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 니골라당을 정확하게 분별하여 그들을 배척했던 것 입니다.이를 주께서 칭찬하십니다.
이처럼 에베소 교회는 세상 풍조와 싸우고 교회 안의 거짓 가르침과도 싸우고 이단을 솎아내는 교회였습니다. 단호하고 분명했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가요.
여러분, 이처럼 에베소 교회는 바른 교훈에 든든히 서 있는 교회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세상과 혼합하지 않았고 진리를 힘차게 고수한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21세기 이 시대의 교회들이야 말로 에베소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분별력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의 단호한 결단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조만간 우리의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지 못하는 지경이 되고 말 것입니다. 거짓 복음에 속아 영생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지옥으로 인도하는 거짓 교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또는 혼합주의에 빠져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에베소 교회는 오고 오는 세대에 모본이요 자랑이 분명합니다.
그들이 상실한 것
그럼에도 여러분! 이렇게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신 주께서는 이제 정색을 하십니다.
이 에베소 교회에 엄중한 말씀을 주십니다.
계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나’ 란 말의 위력을 아십니까? 그러나 라고 하는 이 한마디는 그 앞에 언급된 수많은 미담들을 무효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 앞에 나타난 풍요함들을 일시에 무너뜨리기에 족합니다.
예를 들지요.
그 청년은 핸섬하고 능력 있고 가문 좋고 사교성 있다- 신랑감이나 사위감으로 딱이지요?
그런데 이 뒷말이 붙는다면... ‘그러나’ 그는 인격이 비열하다! 어떻습니까?
그 여자는 예쁘고 총명하고 사교성이 넘친다- 그러나 거짓말쟁이야??
그 목사는 잘생겼고 설교 잘하고 박사 학위를 가졌다- 그러나 사생활이 지저분하다??
모든 게 끝장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이 ‘그러나’를 조심하며 살도록 합시다.
이를 교회에 적용하면 어떨까요?
그 교회는 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주차가 편하고 프로그램이 다양하고 사람이 많이 모인다... ‘그러나’ 진정한 복음이 선포되지 않는다??
보십시오. 여기 에베소 교회가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풍조와 싸워냈고 이단을 잘라냈고 교리를 지켜냈습니다. 훌륭하지요. 그러나...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 치명적인 문제는 무엇일까요?
계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문제는-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아니 에베소 교회는 여러모로 위대하지 않은가? 그런데 한 두가지가 부족함이 있으면 어때요?
아닙니다. 처음 사랑을 버린 그것이 결정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가?
계2:5 ...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보십시오. 주님의 준엄한 처방을.
너의 처음 사랑이 어디서 떨어졌는지 회개하고 처음의 그것을 가지라.. 그렇지 않으면?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촛대를 옮긴다는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떠나신다는 뜻입니다. 교회 모양은 있어도 더 이상 생명 있는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거듭남의 역사도 없고 복음의 능력도 없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종각위에 십자가를 세우고 거기 모인 자들이 종교 행사를 펼친다 해도 더 이상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성령이 떠난 교회- 상상이 되나요? 너희가 그 문제를 회개치 않으면 그렇게 된다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 처음 사랑
여러분, 그렇다면 주께서 지목하신 처음 사랑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기에 교회의 절대 운명과 직결됩니까? 그게 있으면 교회이고 없으면 교회가 아닌 것입니까?
여기서 ‘너의 처음 사랑’으로 번역된 원어는 ‘너의 그 첫 사랑’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너의 첫 사랑... 예수님의 거룩한 보혈과 그 은총으로 구원받아 생명을 받았고 가족 된 그날의 그 사랑을 말합니다.
이들이 모여 에베소 교회가 처음 세워지고 함께 모일 때 그들이 가졌던 그 사랑을 말합니다.
그들 모두는 눈물과 감격 없는 예배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는 열망을 가졌고 그저 주님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봉사를 하던지 십자가로 인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모든 행위의 동기였습니다. 바로 사도들이 가졌던 그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달라진 것입니다. 자신들도 미처 몰랐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더 이상 예배가 아니며 종교적 행위였습니다. 그 안에 하나님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마치 구약의 백성들이 여호와께 제사는 드리되 그 마음이 다 떠났고 그저 때 되었으니 가서 제물이나 드리자... 그래서 그 제물이 여호와를 기쁘게가 아닌 역겹게 만들었던 것 같은 그런 지경으로 들어 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첫 사랑의 상실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옆에서 같이 예배드리는 다른 성도들을 상실했습니다. 그들과도 더 이상 끈끈함이 없었습니다. 주님의 은혜 안에 한 가족 됨이란 의식이 사라졌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본래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곁의 형제에 대한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인간은 본래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깨달은 자는 곁의 형제를 형제로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사람들은 십자가를 통해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을 성도 간에 나누는 데에도 열심이었습니다. 가난 한 형제를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고 기꺼이 도와주었습니다.
주께서 나를 사랑하심 같이 나도 형제를 사랑했습니다. 이때 사랑의 기준은 십자가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 어느 순간부터 에베소 교인들 안에는 메마른 관계만이 남았습니다. 더 이상 그들은 영적인 가족이 아니었습니다. 만남이 기쁘지 않았고 한 마음으로 예배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에베소 교회는 위로 하나님에 대한 지고한 사랑을 상실했으며 옆으로 성도간의 하나 되는 사랑도 잃어버린 것입니다.
주께서는 이러한 에베소 교회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너무 가슴 아프셨습니다.
결국 주님은 통탄하십니다. ‘너는 본질을 상실한 교회’라!
사랑의 상실 이유는
궁금합니다. 도대체 에베소 교회는 왜 그렇게 되었는가? 많은 칭찬 거리를 가진 저들이 어쩌다 주님의 준엄한 책망을 듣게 되었는가? 이들은 어쩌다 그 지경이 되었나?
계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본래는 그들에게 사랑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떨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생각해야 했습니다. 이 첫 사랑이 어디서 떨어졌나? 무엇하다가 떨어졌는가?
자, 시간을 되돌려 이 에베소 교회의 출발을 눈 여겨 봅시다.
이 교회는 바울의 3차 선교 여행 때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향한 바울의 예언적 경고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행20:29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행20:30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무슨 말입니까? 장차 에베소 교회를 해하고 양떼를 해치는 두 종류의 원수가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나운 이리요 다른 하나는 내부에서 일어나는 원수입니다.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자 에베소 교회는 대항하여 싸우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눈을 부릅뜨고 거칠게 밀어내고...
그러나- 그 싸움에만 집중하는 가운데 저들의 영혼은 메말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들의 심령은 사나워졌고 서로가 서로를 판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신학적으로 정확하고 엄격하려했습니다. 윤리적으로는 준엄하기 그지없는 잣대를 들고 그 잣대로 서로를 재기 시작합니다. 누가 무슨 말만 하면 무슨 문제가 있나 의심의 눈초리로 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는 법정과도 흡사해졌습니다. 적들과 싸우다가 형제를 의심하고 미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적과의 싸움들을 계속하며 마음이 황폐해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정작 신앙의 핵심이요 교회의 본질인 사랑이 다 고갈되었습니다.
고전 13장의 핵심 주제가 무엇입니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
제 아무리 훌륭한 행위라 해도 천사의 말을 한다하더라도 자기를 희생하여 구제한다 할지라도... 그 안에 사랑이 결여되었다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 아닌가요.
고로 이제 그들에게 요구되어야 할 것은 믿음이나 신학적인 정통 교리가 아니라 ‘처음 사랑’이어야만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것은 그 신촌 사경회에 모였던 사람 들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한국교회의 성장사는 한국교회의 분열사와 궤를 같이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발견되는 것은- 소위 보수 신학을 주장하는 교파 교단들이 분열의 진원지라는 점입니다.
수도 셀 수 없는 교단들이 장로교를 표방하고 게다가 합동이라는 이름까지 쓰고 있다는 이 불편한 진실을 아십니까? 도대체 왜?
보수적 교리를 지킨다는 열심히 지나쳐 결국 마음까지 좁아진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서로의 다름을 틀림이라고 하며 핏대를 올리게 된 것 아닐까요? 걸핏하면 상대방을 이단이라 정죄하고...
심지어 요즘은 신천지 같은 이단까지 나서서.. 요즘은 교회들이 새신자 들어오는 것을 꺼리는 형편이라고 합니다. 그가 신천지가 보낸 자인지 모른다는 의심... 그래서 반갑게 맞이하고 성도의 사랑으로 맞이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곁눈질하고 왕따 시키고...
이거 사단이 아주 수지맞는 장사입니다.
우리는 그러면 안 됩니다. 그가 누구이든 우리 교회에 들어오면 사랑하고 보듬고... 심지어 이단이라도 들어오면 여기서 그 사랑에 녹아지게 만드는 멜팅 폿..그게 교회 아니겠습니가?
한국 교회가 분열되는 일에는 서로가 서로를 판단하고 이단시하는 경향과 맞물려 있습니다.
목회하며 느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어느 누구라도 갑자기 이단 될 수(?)가 있습니다. 왜? 한 주일의 설교를 살펴보면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실수가 있는지... 얼마나 불확실함이 내재되는지. 그래서 누군가가 악한 동기로 설교를 분석한다면 남아날 목사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오래 전에 그런 교인에 대해 들었습니다. 실화입니다.
그는 주일마다 목사의 설교를 꼬박꼬박 적었습니다. 그냥 듣는 것이 아니라 한 자도 빼놓지 않고 적는 것입니다. 대단하지요? 그런데 그 이유는? 목사의 허물 잡으려고!
그가 과연 정상적 성도입니까? 과연 예배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다 망각한 사람들... 마음이 차가워진 사람들.. 그들에게는 감격도 감사도 눈물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 대한 의무감만 차갑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곁의 성도들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기하고 미워합니다.
오늘날 교회에 팽배하는 극단적 교인 관계는 둘입니다.
서로를 이용하는 이해관계, 그리고 라이벌 관계. 저 사람을 이용할 수 있을까 장삿속이지요... 반면에 저는 나의 적이요 라이벌이야.
이러다 보니 교회 안의 다툼이 일상화되고 세상은 교회를 비난하고 너나 잘하세요.. 이 지경이 되는 것입니다..
골 3: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우리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안에는 140개 노회가 있습니다.
좋은 노회들도 있지만 적지 않은 노회들이 그 안에 계파와 세력 싸움이 존재합니다.
싸움이 끊이지 않는 노회의 친구 목사가 탄식했습니다.‘노회 개회 때 예배드리는 거..그거 안했으면 좋겠다. 미움을 가슴에 품고 무슨 예배야? 더욱이 성찬식은 정말 못 참겠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며 떡을 떼는 게 성찬식인데- 개회되는 순간 상대를 짓밟을 준비를 하는 자들이 무슨 성찬의 떡을 나누는가? 보혈의 잔을 드는가?
아! 공감이 되는 신랄한 지적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경외하지 않는다면 그가 드리는 예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헌금이 무슨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행하는 모든 봉사가 무슨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성도 여러분! 에베소 교회의 교훈을 깊이 새기십시오.
우리 창성교회도 이 교훈을 가슴으로 받으십시오.
지난 긴 세월 수고했습니다! 교회당 건축이라는 큰 싸움을 했습니다. 복음을 멸시하고 교회가 위축되는 이 시대와 맞서서 정말 교회다운 교회를 꿈꾸었습니다. 선교도 힘 있게 하고 구제도 정말 제대로 하는 사회 속에서 주님의 명예를 드높힐 수 있는 교회, 세상을 이기는 복음의 능력이 있는 그런 교회를 그려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루한 싸움이었습니다. 그 일에 수년간 온 교인이 모두가 매달려 지내는 시간 동안 우리는 많이 메말라졌습니다. 싸우느라 기도도 소멸된 것 같습니다.
더구나 그 싸움의 결과가 가시적 실패로 나온 지금... 허탈함은 하나님께 대한 상한 마음으로 그리고 서로에 대한 실망으로 표출되고 있습니다. 따뜻한 웃음보다는 차가운 한숨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그런 말하드군요. 예배 시간 중에 가장 힘든 순간이 있다. 바로 서로 인사하라는 시간이다! 마음이 없는데 사랑합니다 반갑습니다 라고 해야 할 때 이건 순교의 각오 없이 못하는 일이잖아요. 따뜻한 마음이 없는데 웃으며 인사하라니...
성도 여러분 ! 이해합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이 아침 다시금 주의 경고를 귀 여겨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아무리 거대한 싸움을 마쳤다하더라도... 혹시 대단한 성전 건축을 완성했다 하더라도 그러나 그것으로 답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계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이 ‘처음 행위’는 처음 사랑으로 행한 모든 것입니다. 처음 사랑을 상실 한 채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창성의 성도 여러분, 주님은 부족하지만 우리의 수고를 칭찬하실 것 같습니다. 우리의 긴 싸움을 인정하실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 비좁은 예배처에 오기까지 참아낸 여러분의 인내를 점수 주실 것 같습니다.
많이 비좁고 불편하지요? 1200석의 교회당을 짓던 우리가 여기 120석의 교회당으로 옮겨 올 때... 그래도 참혹함이 아닌 감사가 있음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충성의 자리를 지켜 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시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처음 행위를 회복해야 한다.
이 새 예배당에서 드리는 첫 예배에서...저 자신도 다짐을 하려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성도들을 사랑하자. 그것이 어떤 것일지를 계속 주님께 여쭈면서 가자.
성도 여러분, 여러분 자신도 깊이 생각하십시오.
나의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회복되게 하소서. 그 처음 사랑으로 예배하고 그 사랑으로 기도하고 그 사랑으로 찬양하게 하소서. 그리고 그 사랑으로 형제를 피차 사랑하는 우리이게 하소서.
그래서 예배 중 서로에게 인사하는 그 시간이 너무 자연스러운 교회, 만남이 너무 행복한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매듭
마지막으로 그 에베소 교회에 주신 끄트머리 말씀을 봅니다.
계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우리는 귀있는 자가 되십시다. 들을 귀 있는 열린 마음, 겸손한 자가 도십시다.
그러면 우리 교회에 주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뭐라고 격려를 주십니까? 우리가 이기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끝내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이는 최후의 승리요 최후의 영광입니다.
아! 우리 끝까지 주님께 충성된 자 됩시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며 형제들을 뜨겁게 사랑하는- 그 신앙의 본질을 치열하게 추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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