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의 경우 어느 집이든 첫째 아이보다 둘째 아이가 영악하다.
작은 아이는 형을 흉내 내며 자라기 때문이다. 형은 흉내 낼 대상이 없다.
인류 문화는 흉내 내기, 모방하기, 베끼기...를 품에 안고 발전해 왔다.
모방은 또 하나의 창조를 배태한다. 거기를 딛고 조금 더 나은 뭔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상품 시장에서는 짝퉁이라고도 하고 작품세계에서는 표절이라고 불리운다.
먼저 그것을 내놓은 당사자에게 허락을 받지 않았거나 밝히지 않은 경우에 이 모방은 한없이 비난 대상이 된다.
이런 논란이 우리 사회의 각 영역을 휩쓸고 있는 듯하다. 누구든지(!) 자칫하면 이 시비에 말려들 수 있다.
우리가 하는 말, 우리가 쓰는 글, 우리가 내놓은 아이디어 그 어느 하나도 100% 새로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누구든 그 시대의 아들이란 말도 있다.
이것을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 해 아래 새 것이 없다’.
신경숙 작가에 대한 표절 논란이 며칠간 계속 되고 있다.
나는 이 보도를 처음 보았을 때, 또 하나의 사람이 다치는구나 싶었다.
소설을 비롯한 문학 작품이야 말로 완벽한 창조물은 없다 싶다. 비슷한 착상을 가진 작가가 얼마나 많을까. 단지 그것을 몇 마디 단어를 다르게 조합했는가 하는 것으로 정당성 여부를 논할 수 있을까.
오늘 보도를 보니 그 본인이 사과의 인터뷰를 한 모양이다.
“모든 게 제대로 살피지 못한 내 탓”이라고 말했다. 그 살핀다는 것이 참 어렵다 싶다. 모든 것을 기억이라는 틀 속에 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절필 선언은 할 수 없다고도 했다. 누군가는 그에게 절필 압력을 넣었는가 싶다.
“ 원고를 써서 항아리에 묻더라도, 문학이란 땅에서 넘어졌으니까 그 땅을 짚고 일어나겠다”고 했다.
맞다고 생각됐다.
표절 시비에 대해 그가 한 말에 수긍을 해주고 싶다.
“창작은 독서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으며 어떤 생각들은 시대와 국경을 넘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도 공통점을 갖는다”
“내 문장으로 쓴 글들이지만 평단이나 독자들의 지적에 대해 깊이 성찰해보겠다”.
우리 시대의 하나의 작가를 파묻어 버리기는 쉽다. 그러나 그 한 사람을 키우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p.s 저녁 내내 아내와 얘기했다.
목사로서 나의 설교는 얼마나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모든 참고 주석을 그 출처를 언급하며 설교할 수는 없는 노릇. 언젠가 읽었다 싶은 누군가의 신앙 서적으로부터의 감명, 누구와의 대화 속에서 얻은 깨달음... 그것들을 다 규명해 낼 재간도 없는 것.
마음 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