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령인가 원칙인가
우리 사회에는 언제부터인가 무원칙이 일반화되고 요령이 승부를 내는 지름길이 되고 있다. 많은 젊은 신입 사원들이 처세술을 먼저 배우기를 원하고, 요령을 터득하기에 혈안이 되고 있다 한다. 한마디로 우직, 성실한 타입의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귀성열차를 타기 위해 줄을 서있던 아이는 어디선가 웃돈을 주고 차표를 구해온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앞질러 차를 탄다. 이미 다 표가 매진되어버린 극장 앞에서 암표를 구해온 엄마와 함께 당당하게 극장에 들어선다.
아이는 생각한다.
?세상은 다 쉽게 사는 방법이 있구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릴 필요가 없구나?
수그러들지 않는 부동산투기만 해도 그렇다. 땀을 흘리지 않고도 돈을 거머쥘 수 있다. 그것은 요령이다. 이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병든 축재 요령이다. 어느 날 갑자기 큰집으로 이사하고, 괜찮은 음식점에서 외식을 하며 희희낙락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는 자식은 불로소득의 재미를 배울 수밖에 없다.
젊은이들이 그런 걸 배워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우리 애만큼은 그런 길에 빨리 눈을 떴으면 하는 이중적 바람이 우리네 부모들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안 된다. 요령은 부모가 가르칠 것이 아니다. 괜히 일찍 서둘러 가르치다간 요령이나 부려 쉽게 살려는 사기꾼밖에 더 될 것이 없다. 손해가 나도 교통 질서를 지키고, 좀 늦어도 제 차례가 올 때까지 줄을 서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철의 여인이라고 불리우는 대처 수상은 타협을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것은 그가 어릴 때부터 그의 부친 무릎 위에 앉아 익힌 생활신조였다.
유태인이 우수한 이유는 많이도 연구되고 있다. 유태인은 세계 인구 중 약 0.3%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계적인 정치가, 예술가, 과학자, 사상가 등 뛰어난 지도자 10명 중 한 사람 꼴이 유태계 인물이라는 사실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보스톤에 있는 하바드 대학의 도서관을 둘러본 적이 있다. 이 대학에 재학하는 소수 민족 중에는 유태인 학생이 단연 많다는 말을 들었다. 이는 그들만의 특이한 교육에서 연유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육이란 지식의 전달이나 요령의 터득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인재 육성이 목적인 것이다. 우직하고 단조롭지만 반복, 복창으로 교과서를 외우고 전신을 움직이며 멜로디에 실어서 음술을 한다.
이처럼 모든 일에는 원칙이 있고, 모든 길에는 정도가 있다. 원칙이 아니면 행하지를 않고, 바른 길이 아니면 가지를 않는 모습을 부모는 보여줄 책임이 있다.
그렇게 배우고 큰 자녀, 처음에는 늦은 것 같고 쳐지는 것 같아도 결국은 승리한다(골 3:23), 더구나 우리 믿는 가정의 자녀들은 더욱 그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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