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교회 용어
살아가며 점점 더 느끼는 것은 바로 ‘말의 중요성’이다. 결국은 말로써 한 사람의 평가가 이루어지고 말로써 그 사람의 장래도 결정된다. 아무리 대단해 보이는 사람도 말이 경박하면 바로 격하된다.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는 이라도 말하는 게 천박하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다. 교인의 교인됨은 그 언어로 평가 될 수 있다.
언젠가 지하철의 경험이다. 참으로 우아하게 생긴 부인 2명이 탔다. 30대 후반의 옷차림도 세련되고 빽도 명품을 들었다. 바로 내 앞 쯤에 다가와 섰다. 잠시 후 둘은 큰 소리로 말을 주고 받기 시작했다. ‘야 그런데 그 새끼는 왜 그러냐...’ 참으로 거친 음성이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를 금할수 없었다. 순식간에 그 여인들의 가치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보았다. 다시는 그들을 쳐다보지 않았다.
한 교회의 건강성, 한 교회의 내적인 분위기는 그 교회가 상례로 쓰는 언어와 상당히 밀접하다. 한 단체가 그 안에서 통용하는 언어는 그 단체가 여하한지 잴수 있는 잣대이기도 하다. 교회가 왜곡된 언어나 케케묵은 말을 그냥 사용하면 그 전체에 곰팡이 냄새가 난다.
성경에는 말에 대한 경고가 수없이 많다. 말로 덕을 끼칠 것을 강력하게 권면한다.
교회의 용어들에 대해서도 생각할 것이 많다.
특히 현재 사용되는 개역 성경의 영향이 크다. 우리가 쓰는 성경은 1세기 전의 작품이다. 따라서 시대적 변천에 따라 오역이나 부적절한 용어들이 많다.
(마 15:30)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참으로 그냥 읽기에 거북하다.
또한 무지함으로 쓰는 잘못 쓰는 용어들도 있다. 혹은 그냥 습관적으로 쓰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불신자’라는 말... 이 말을 예수 안 믿는 사람이 들으면 어떨까? ‘비신자’라는 말이 더 우아하다.
샤마니즘의 영향은 교회 안에 비신앙적인 용어들의 진원지이다. 옛 풍습에 마을 굿을 보고 나중에 떡을 나누어 먹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다’는 말이 나왔다. 사람들은 보통 예배를 ‘본다’고 한다. 이는 신학적 문제도 있는 용어인데도 그냥 사용된다. 엄격히 말하면, 새벽 제단, 가정제단, 백일기도, 별미 헌금등도 반듯하지 못하다. 그 외에도 무심결에 쓰는 ‘지성이면 감천’, ‘십시일반’, ‘이심 전심’, ‘운이 좋다’ 등등도 기독교 신앙과 배치된다.
외에 무례한 말들도 문제가 된다.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장로가 집사에게, 기성 신자가 새 신자에게, 연만한 성도가 젊은 교역자에게 반말을 하는 경우를 본다.
가까울수록 정중하고, 예의바른 언어를 쓰는 것이 합당하다.
특히 일부 부흥사들의 설교 속에서도 비어, 속어등이 남발하므로 강단 용어의 천박화를 재촉하는 일들이 있다.
끝으로 기억할 일이 있다. 교회는 교회만의 고유한 문화가 있다. 교회 안에서 오래
생활해 온 사람은 잘 느끼지 못한다. 마치 김밥을 방 안에서 먹으면 먹은 우리는 잘 못 느낀다. 그러나 밖에서 막 들어온 사람은 심하게 냄새를 느낀다.
교회 문화도 뜻 밖에 그 담이 높다.
생전 처음 교회 나오는 사람을 생각해보라! 모든 게 생소하다. 남녀가 섞여 그냥 앉는 것부터, 기도할 때 눈을 감는 일, 아멘 할렐루야 등을 맘대로 쓰는 일, 서로 서로 김집사님, 이집사님 하며 부르는 일...
우리는 문턱을 낮추는 작업을 해야 한다. 비신자들이 접하기에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와 생소하지 않은 용어들을 계발해야 한다.
건강한 교회는 바른 용어들을 사용한다.
바른 용어들은 건강한 교회를 이끌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