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그리고 목양/건강한 교인이 알아야 할 200가지

위대한 설교자

johnleejw 2010. 7. 8. 10:46

무엇이 위대한 설교자를 만드는가?

 

목회자야말로 천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다.

목회자에 대한 기대와 요구는 그 시대와 사회마다 조금씩 달라져왔다. 더구나 바쁘고 복잡한 현대를 사는 성도들은 목회자에게 더 많은 요구를 해온다. 개인적인 자질은 물론, 기능면에서도 더 많은 역할을 해내야 한다.

그야말로 ‘팔방미인’인 목회자를 우리는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많은 직능들 가운데 역시 유능한 설교자로서의 목회자야말로 가장 요청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목회자의 자질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것은 ‘설교를 잘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답한 평신도가 47%에 이른다. 그리고 자신의 교회 선택의 요인으로도 ‘목회자의 은혜로운 설교’를 꼽고 있다.

사실 개신교 교회에서는 강단이 교회의 중심이 되어 왔으며, 그래서 목회자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거나 가르치는 일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많은 교인들 중에 설교에 만족하고 또 설교를 통해 영적으로 성장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한다.

 

사실 목회자의 설교에는 그 설교가 언제 어디서나 모든 청중에게 큰 감화를 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설교자의 설교 준비나 화술이 언제나 성공적일 수 없고, 또 청중의 지식과 교양이 다양하므로 청중의 설교 평가도 일률적일 수 없다. 그래서 수십년 강단에 선 목회자라도 설교를 하려고 강단에 나설 때마다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설교를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것이 원로급 설교자들의 공통된 생각이라고 한다. 설교가 해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은 앵무새처럼 지껄이거나 자신은 은혜 받지 못하는 설교가 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나 자신도 설교한 후에는 전하여야 할 말 씀을 전했다는 기쁨보다는 언제나 떨떠름한 생각을 갖는 갈등이 있어 왔다. 그나마 “오늘 설교가 왜 이래요?”하는 아내의 설교평이라도 듣는 날에는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목사가 성직자로서 인격이나 경건성이나 윤리성을 소홀이 여기고 설교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을 한다면, 목사 자신이나 교회를 위하여 커다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서울 강북의 한 교회는 단지 ‘설교 잘 하는 목사’라는 기준으로 담임 목회자를 청빙했다가 커다란 곤욕을 치룬 적이 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설교자로서 목회자가 경험하는 분명한 문제는 설교를 듣는 청중의 귀가 상당히 고급화 되었다는 사실이다. 현대인은 여러 종류의 매스콤을 접하고 또 누리고 있다. 어디서든 라디오 다이얼만 돌리면 거의 24시간 찬송 혹은 설교를 들을 수 있다. 각종 인쇄물에 잘 다듬어진 설교문들이 실려 나온다.

소위 유명한 설교가들의 설교가 담긴 테이프가 교인들 사이에 오고 간다. 좀더 훌륭한 설교를 듣고 싶어하는 평신도들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이처럼 '기성제품화'된 설교들의 선제 공격에 기운을 잃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평신도들은 이것을 알아야 한다. 나의 교회 안에서 나의 목회자가 나를 위해 준비한 메시지가 던져질 때는 영적인 긴장감과 부담감이 있다. 하지만, 라디오나 테이프를 통해 설교를 들을 때 우리는 때로 그 설교를 그냥 ‘즐길 수’있다. 여기서 생기는 것이 바로 영적인 편식현상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그 문명의 이기는 하나의 영적 공해가 된다.

 

사실 좋은 음식도 거기에 따른 적당한 운동이 없이 섭취하기만 하면 오히려 해가 됨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영적 비만증에 걸린채 소위 귀만 커진 기형적인 교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약 1:22)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열심을 낸답시고 여기저기 특히 오늘날처럼 진리를 가장한 집단이 곳곳에 산재해 있는 터에 독초가 독초인줄 모르고 뜯어먹는 어리석은 양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밖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곳에 갈 때는 미리 담임 목회자와 상의하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이다.

 

또 하나 강단의 설교가 교인들의 갈급을 해소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목회자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다.

사실 모든 목회자가 다 타고난 능변일 수는 없다. 모든 목회자가 똑같이 설교나 가르치는 은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목자장 되시는 주께서 각 목양지에 흡족한 은혜를 예비하고 계심은 확실하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의 목회자들이 그 은혜를 기다릴 만큼 여유가 없다는 사실이다. 심방자로서, 상담자로서, 행정가로서, 또 각종 회의 참석으로 너무도 분주한 나날을 보낸다는 사실이다. 실로 공사간에 다망하신 것이다. 1주일에 큰 설교만도 두 세 차례가 넘는 데다가 이럭저럭 작은 설교도 상상을 초월한다. 아무래도 많은 양은 질을 저하시킨다.

한 마디로 목회자 자신이 그 말씀에 흡족히 젖어들지 못한 채 설익은 식탁을 급히 차려 내놓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강해설교가로서 우리 한국 교회에도 낯익은 데니스 레인은 주일 낮의 설교를 위해 한 주간 내내 묵상과 연구를 한다고 고백한바 있다.

 

우리의 신학교 시절에 학기초 개강 사경회를 인도한 강사를 기억한다.

그날의 본문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였다. 본문을 읽고난 그는 다 낡아버린 원고를 흔들어 보이며 “여러분 나는 이 설교 원고를 50번은 더 사용했을 것입니다.”라며 호탕하게 웃어 제겼던 것이다. 그것은 아직도 여리기만한 신학도의 가슴에 커다란 충격이 되고도 남았다. 그때까지 우리는 설교란 그때 그때 준비해서 뜨거운 열정으로 뛰쳐나가서 외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도 그때의 사경회는 맥빠진 것이었다. 그 저명한 강사가 차려내놓은 말씀은 식탁은 그야말로 다 식어버린 밥상이었을 뿐이다. 그는 신학교 같은데 와서 설교하기에는 너무나 바쁜, 그래서 50번씩이나 같은 설교를 읊조려대야 했던 ‘거물급 인사’였던 것이다.

 

물론 위와 같은 경우는 목회자 자신의 자기관리에 속한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 어떤 목회자는 어쩔수 없이 설교자로서보다 다른 교회일들에 쫓김으로 풍성한 말씀 준비를 못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교회는 목회자가 덜 중요한 일에 쫓겨다니지 않도록 심도 있게 배려할 필요가 있다.

 

설교는 누가 할 수 있는가?

여기에는 두가지 주장이 나올 수 있다. 하나는 은혜를 받고 말씀을 깨달은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설교는 반드시 세움받은 목회자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는 가능하기는 하지만 설교가 평신도의 사역이 될 수는 없다. 구역장이나 권찰이 구역원을 권면하거나, 교사가 공과를 가르치거나 하는 행위는 별개의 것이다. 평신도가 쉬 설교를 할 수 없다고 하는 이유는 설교의 일차적인 작업은 신학적 작업이요, 해석학적 작업이어서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몇가지 체험담 정도로 이해하면서 설교를 한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성경을 읽고 간증을 하는 것은 설교와 동일시 될 수 없다.

 

근자에 가정이나 특정인을 중심으로 한 말씀공부, 혹은 은사집회라는 것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곳에 가면 병고침, 예언, 방언기도가 있고 또 기성교회에서 느끼지 못하는 뜨거운 분위기가 있다.

쉬쉬하며 모여든 신도들은 인도자의 영적 권위에 눌려 그 한마디를 천금가치 소중히 여긴다.

그런데 문제는 병고치는 이가 병만 고치면 좋겠는데 말씀을 가르친다. 교인의 일상사에 대한 예언을 하고 또 성경구절까지 알려준다. 때로 무지한 교인은 이것을 마치 거액을 주고 사들인 부적과 같이 취급하고, 막상 본교회 강단에서 주어지는 말씀은 대수롭잖게 여기게 된다.

 

말씀의 은사를 가진 목사가 자기가 갖지 못한 은사를 가진 집사나 권사를 향해 그런 은사는 소용없다고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신유의 은사를 받은 이가 기성교회나 설교자를 비난하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큰 병폐는 이에 현혹된 교인이 말씀의 터 위에 자기 신앙을 세워가지 못하고 그저, 초라한 체험 한 두 가지만 붙들고 그것이 다인냥 하는 어리석음이다.

자신의 무지나 나태함으로 말씀사역을 부실히 하는 설교자는 주님의 날에 중한 책임을 묻게 될 것이다. 철저한 말씀 준비를 위해 목회자는 자기의 한 주간의 스케쥴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 다 써놓고 차례차례 정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 교회의 목회자가 바른 설교자, 말씀의 권세를 지닌 설교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바로 평신도인 나의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예배시간, 일찍이 나와 조용히 머리숙여 오늘의 설교자를 위해, 그 말씀을 받을 자신의 영혼을 위해 간곡히 기도하는 성도가 위대한 설교자를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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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설교자가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청중들만을 상대하여 설교한다면 그는 악순환에 빠지고 말 것이다.

연로한 부인들은 감상적이어서 문제 의식을 가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복음이란 삶의 크나큰 투쟁을 의미할 수 있고 또 불같은 정열을 불러 일으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고 지적해 주어도 연로한 부인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거의 알지 못한다. 만일 내가 모인 청중들만을 생각하여 설교를 한다면 연로한 부인들의 환심은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가게 될 것이다(이 말이 존경하는 교회의 어머니들이나 할머니들에게 대한 직접적인 풍자라고 오해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젊은이들이 백발 머리의 그룹에 끼어들 모험을 하겠는가? 그리고 설교가 오직 백발 머리들만을 위한 것일 때, 누가 도망가지 않을 것인가?

설교자는 이러한 악순환에 빠져서는 안된다. 설교자는 그들이 교회에 나와 있지는 않으나 마치 교회에 나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설교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그들도 올 것이다.

H. 틸리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