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그리고 목양/건강한 교인이 알아야 할 200가지

목회자와 상식

johnleejw 2011. 2. 6. 15:45

상식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한 신학생이 긴 산기도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큰 시냇물을 건너게 되었다. 그에게는 은혜가 충천해 있었고, 또한 미든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는 확신이 가득해 있었다. 잠시, 이 시냇물 위를 걸어서 건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 기도에는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도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믿었으며 주저없이 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보라! 결과는 어처구니 없이 물속에 빠져버린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시몬 베드로에게는 주님께서 물위를 걸어서 내게로 오라고 하셨으나, 이 청년에게는 그렇게 말씀 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좀 우스갯 소리인듯하나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목회자가 일상의 삶속에서 상식을 벗어나는 수가 종종 있다. 그런 행위들이 ‘믿음’ ‘하나님의 뜻’등으로 포장될 때는 참으로 감당하기 어렵다.

상식은 인간 사회의 공통적인 개념이며, 또 인류의 존속을 위해 지극히 필요한 행동기준치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일반 상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일들이 벌어짐을 볼 때가 있다. 결국 이는 교회가 사회단체만도 못한 몰상식한 처사를 행하는 일을 야기시키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믿음과 성령을 내세워 막무가내가 되기도 한다. 참으로 딱한 일이다.

 그래서 성령의 사람 무디는 “우리는 성령의 세례를 받기 전에 상식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바 있다. 특히, 목회자는 상식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한 예로, 젊은이가 노인에게 예우를 갖추는 것은 상식이다. 아무리 목사라 하지만 노인들 앞에서 권위만 세우려 한다면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강단에 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백발의 할머니들에게 발만을 내갈기는 몰상식한 일부 부흥사들에 관한 얘기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신학생 시절, 나는 교정 곳곳에 써 있는 교훈을 볼 수 있었다.

 

신자가 되라!

학자가 되라!

성자가 되라!

전도자가 되라!

목자가 되라!

 

그렇다. 우리는 목회자가 되고 학자가 되기 이전에 우선 신자가 되어야 하겠다. 그러나 요즘 와서 생각하면 맨 앞에 하나 더 써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즉 ‘사람이 되라’ 하는 말이다.

우리는 목회자가 되고, 장로가 되고, 직분자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설 수 있어야 한다.

 

교도소에 근무하는 이가 한 말이다.

“요즘은 성직자들도 이곳에 많이 옵니다.. 성직자 중에 목사님들이 많이 옵니다. 슬픈 것은 그들이 그 흔한 시국문제와 관련된 것도 아닌, 세상 사람들이 많이 짓는 그럼 범죄류에 연루되어 들어오는것입니다.”

단순히 은혜받고 은사체험하고 재질이 있다고 목사가 되는 아니다.

 

교회에서 열성내는 청년을 보면 으레가 신학교에 가라고 했던 이제까지의 병폐는 해소되어야 한다.

 또 똑독하다고 목사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요즘은 웬만큼 준비해서는 신학교에 들어갈수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신학교에도 똑똑한 사람, 잘난 사람이 많아졌다. 그러나 반면에 성실한 사람, 참된 사람은 보기 힘들어졌다는 교회 원로들의 고언이 있다. 난사람은 많으나 된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성직자가 그 사회나 교회에서 문제인물로 주목받는다면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교인들을 인도하고 염려해야 할 목회자가 오히려 교인들의 걱정거리로 등장된다면 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 결국은 사람의 문제이다.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똑똑하고 능력있는 사람보다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먼저 되는 일이 중요하다. 목사이기 이전에 그는 진길하고 겸손한 한 인간 이어야 한다. 그는 진실하고 겸손한 한 인간 이어야 한다. 그는 가정에서는 존경받는 가장이어야 하며, 동료들 사이에서는 신뢰받는 벗이어야 한다. 언제나 신령한 표정을 짓고, 근엄한 몸짓으로 치장하는 사람이 아니다. 성직자라고 말하기 이전에 인격적인 모습을 갖춘 건전한 사회인이어야 한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교회의 타락은 그 시대의 타락과 종말을 야기시켰고, 교회의 타락은 성직자의 타락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이시대의 문제는 교회의 문제요, 교회의 문제는 목회자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자성하고 싶다.

그렇다. 우리들의 목회자는 바람직한 상식을 지닌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상식 그 이사의 초월적 안목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이어야 한다.

 

하던 일들을 멈추고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의 치명적인 질병 가운데 하나는 ‘바쁨’이다. 지나치게들 바쁘다.

어느날 한 신학교 후배가 목사로서의 나의 기도 생활에 관해 물어왔다. 그러나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오히려 숨가쁘게 수업과 과제물에 쫒기던 신학생 시절이 오히려 더 기도와 말씀을 위한 시간을 낼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그래도 방학이 되면 다만 며칠씩이라도 보따리를 싸들고 한적한 산을 찾아 올라 갔었다. 그러나 더 여유가 있으리라 여겨 졌던 나의 목회현장은 오히려 숨가뿐 바람개비와도 같았다.

 

오래전에 한국을 방문했던 선교학자인 허버트 케인은 목회자들을 향해 이런 충고를 했었다. “여러분들을 보면 예수님보다 더 바쁜 것 같습니다.” 부끄러운 지적이었다.

 

너무도 바빠서 주님과 대면할 시간이 없고 너무도 분주하여 기도의 골방을 마련하지 못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그러하듯 목회자의 신앙의 뿌리도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이요, 지속적인 만남이다. 영적 전쟁터에서 앞에 서있는 목회자는 더더욱 그러하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엡6;12)기 때문이다. 마틴루터는 하루에 두 시간씩 기도했고 일이 너무 많을 때는 세 시간씩 기도했다고 하며, 찰스 시므온은 매일 새벽 4시부터 아침 8시까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가졌다고 한다. 위대하고 존경받는 목회자나 선교사일수록 기도생활에 실패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목회자로서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는 사역을 감당하려면 최소한 얼마의 시간은 기도에 바치지 않고는 불가능 하다. 그런데 문제는 하루중 그러한 시간을 떼어 하나님께 충성스럽게 바치지 못하는데 우리의 목회에 고민과 갈등이 있다.

설교와 심방, 그리고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을 열심히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전도와 봉사, 그리고 세계선교에 앞장서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목회자와 기도하는 교회가 되는 일이다.

 

너무 바쁘지 않도록 하자!

누가 주님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을까? 그러나 그분은 그 바쁜 중에도 하늘 아버지와의 교제를 놓치지 않았다. 아침이슬을 털며 산을 내려오시는 주님의 얼굴에서 제자들은 지칠줄 모르는 생명력과 잔잔한 능력을 읽을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