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도 11월에
첫 예배를 드렸던 코벤트린 한인교회...
하나님은 예비된 사람들을 만나게 하셨다.
주재원으로, 유학으로 만난 귀한 젊은 집사님들,
럭비의 귀한 자매님들...
그리고 위릭대학과 코벤트리 대학의 형제 자매들...
급속히 자리잡은 건강한 교회로 자라갔음에...
리폼드 교회의 빌 목사와
교회 설립 첫 예배를 드린 후 96. 11
눈이 엄청 나게 내렸다......
아름다운 예배당...리폼드 처치. 좋은 예배 환경
최종현 선교사님의 깜짝 방문.
중간 위. 동역자 심경보 선교사, 방문한 박영덕 목사님.
아래. 함께 제자훈련으로 자라갔던 자매님들... 공부시간에는 눈물이... 끝난 후에는 한없는 즐거움과 회식이...
이들에게 이 자리는 일주일에 한번 있는 여유로운 한국 음식의 잔치... 때로는 fish & chips도.
매년 1회씩 누리던 특별한 시간! 전교인 수련회... 모두가 따뜻하던... 피터씨네는 언제나 출석~...
중간. 유학중 IMF를 무사히 건너던 의지의 류정현 집사님네... 애기가 Mr.찬욱.. 악동ㅋㅋ
아래. 수련회 강의 중
코벤트리 교회의 부활절...
오전에 영국인 성도들이 얼마나 장엄하게 단장을 해놓았던지...
중간 위. 옥스포드 한인교회와의 연합 예배. 중간 쯤에 담임 화종부 목사.
아래. 방문한 윤철원 교수, 이선우 집사님과.
해외 한인교회...
교회 성장학 시간에 교회의 성장의 유형중에는 ‘수평 이동 성장’(Transfer growth)이 있다는 것을 배운적이 있다. 이건 불신자가 회심하여 새로운 교인이 됨으로 획득하는 진정한 의미의 성장은 아닌 것이다.
더구나 이는 온 세계 모든 교회 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볼때는 무의미한 것이다. 마치 오른 쪽 호주머니의 돈을 왼쪽으로 옮기고는 많아졌다고 우기는 정황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언필칭 몇몇 교회들은 급성장을 하노라고 광고를 하며 이것이 안으로 살펴볼 때 다른 교회 교인의 유입임이 확실 할 때, 주님의 마음은 황당할 것이 뻔하다.
이점에서 근자의 한 젊은 목회자의 글은 귀 기울일만 하다. 자신은 불신자가 회심하여 들어오는 진정한 성장을 기대했다. 그럼에도 외부에서 이동하여 온 교인들이 제법 많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은 다른 교회의 ‘독소’를 함께 가지고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이런 점은 우리네 해외에 있는 한인교회들이 한 수 위이다.
아니 해외의 교회들은 그 수평 이동의 극심한 도움과 폐악을 함께 누리는 현장이다.
우선 해외 한인교회는 한마디로 한국 교회의 축소판이다.
교인 50명만 모이면 거기에는 50가지 교회론이 존재한다. 우선 장로교인이 있는가 하면 감리교인 침례교인 성결교교인 순복음 교인이 다 있다.
장로교는 또 같은 장로교인가? 기장과 예장은 얼마나 천양지차인가? 예장은 또 같은가? 통합과 합동, 고신은 또 얼마나 냄새가 다른가?
거기다가 시골교회에서 자란 사람, 도시교회 나아가 서울 교회의 교인들은 또 얼마나 딴판인가? 그들의 신앙 칼라가 다 다르고, 교회에 대한 관점 -자기가 경험한 교회가 전부인줄 아는- 이 또 각기 다르다.
소위 유명한 교회에서 온 사람은 마치 자기 신앙도 그 교회와 같은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이름있는 목회자의 교회 출신은 자기 신앙 수준이 그와 같은 것으로 오산하는 것 같기도 하다.
또한 직분의 문제이다.
어느 교회는 어느 정도의 훈련된 사람을 직분자로 세우는지 알 길이 없다. 그래서 집사,권사, 장로의 이름을 들고 오는 사람들이 일반 평신도의 수준에도 못 미치는 신앙의 자리에 있는 것을 보기도 한다.
앞의 젊은 목회자의 말을 빌리자면, ‘온갖 잡새가’ 다 집합될수 있는 곳이 해외의 한인교회이다. 그래서 걸핏하면 말썽이 나고 분규가 일어나는 곳이 한인교회이다. 자칫하면 온 교인이 누가 잘났는가 내기하느라고 여념이 없게되기도 한다. 분위기의 물꼬를 엉뚱한 잡새가 잡으면 그렇게 된다.
결국, 해결의 길은 하나이다.
교회가 온도 1000도 이상의 용광로(Melting pot)로서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어떤 종류의 것이 들어오더라도 그 자체의 온도에 함께 녹아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독소를 묻히고 들어오면 기도로 집중 폭격하고 사랑으로 끌어 안으며 말씀으로 새롭게 자리매김 하는 것이다.
목회자는 마치 밤을 새워 지키는 파수군 같이 교회의 교인들의 영적 증상과 흐름을 예민하게 간파하고 주님이 그러셨듯이 자신을 쏟아붓는 길에 나서야 한다.
나는 요즘도 다시 묻는다.
우리 교회는 멜팅 폿트로서의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가?
98년 11월 20일
전교인 야유 수련회.. 한국인 영국인 가족들 모두가 즐거운 한마당
이토록 신날수가 있을까...
점잖게 어울려 주던 봅, 토마스 아저씨등...
2000. 3.25 교회에 이임인사를 하며
교회의 젊은 피들~
교회 행사에 초대된 영국인 교회 가족들...
우리 교회가 속한 IPC노회 노회장 런던의 김북경 목사님 내외분과
참 좋은 사람들, 럭비 가족들...럭비가 탄생된 동리~
코벤트리 한인 교회를 사임하며
나는 지금의 나를 생각할 때 마다 깜짝 놀라곤 한다.
어쩌다가 내가 이 만큼 왔을까...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있는 현실이 남들과 비교해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의 현재의 모습은 내가 예측할 수 있는 것보다는 분에 겨웁다.
자라면서 나는 도시나 외국에 대한 꿈같은 것이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중학교 때에야 동네에 전기가 들어오는 벽촌 동네에서 빤한 하늘만 쳐다보고 자랐기 때문 일 것이다.
그러기에 전교생이라야 한 됫박 밖에 안되는 시골 중학교에서 서울로 고등학교를 찾아 떠났다는 것은 내 생애에 대단한 사건이었다. 그 직접적 원인은 학비를 전액 국비로 대주는 학교가 있다기에 찾아 나선 것. 어떻게 해서라도 고등학교는 마쳐야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 만만찮은 경쟁 속에 턱걸이를 하여 들어갔다.
학교를 졸업하니 꼼짝없이 의무 복무라는 걸 해야했다. 어디 공짜로 학비를 대주었겠는가.
철도 공무원- 이름은 근사했지만 처음에 내게 배당된 일은 선로반의 중노동이었다.
지금도 신촌 연세대 입구의 철길 위에서 작업을 하면서 백양로를 오가는 학생들을 망연히 바라보던 기억이 선연하다. ‘어떤 녀석들은 부모 잘 만나서 책이나 끼고 몰려다니는가’ -당시 박탈감으로 가득했던 나의 신음이었다.
그것으로 나의 길은 결정되었어야 했다. 그것은 어쨌든 내게 주어진 현실이요 미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입대 영장을 받아 쥐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그 짧은 군생활 중에 신학을 하는, 하려는 동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내 속에 아련하게 묻혀 있던 불씨 하나를 상기하게 만들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어른들을 따라 인근의 기도원에를 갔다가, ‘앞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사람은 일어서라’는 강사의 말에 얼떨결에 일어섰던 일.
제대를 하고 다시 철도에 복직이 됐으나 이듬해 사표를 내던졌다.
왕십리에서 서빙고에 이르는 철길을 선로 순회하며 꽁꽁 언 한강을 내려다보며 마지막 결심을 확인했다. -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다!
비켜 지나갔던 대학의 꿈. 총신대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늦깎이로서.
다른 형제들의 뒷바라지에 여전히 숨가쁜 고향 시골 집을 향해 손을 벌릴 염치는 없었다.
79년도에 받았던 교육전도사로서의 첫 수고비 2만 9천원. 그렇게 살기 시작했다.
무슨 캠퍼스의 낭만 같은 얘기는 내 사전에 없었다. 그저 대학생이요 신학생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견했다.
교회 가서 아이들 얼굴만 봐도 타오르던 교육전도사 생활....
교회 사역에 정신이 빠져버린 채, 공부는 뒷전이었으나 졸업은 됐다. 곧 바로 신대원으로 진학했다.
그 동안 결혼도 했다. 등록금은 학자금 융자로 해결했다.
신대원을 무사히(?) 졸업하던 날 ..... ‘이제는 더 이상 욕심이 없다’고 혼자 속삭였다.
그 후, 전도사로 강도사로 앞 뒤 모르고 뛰어다녔다.
85년도에는 교육전도사 때의 고충-아이들을 가르칠 마땅한 교재가 없다-을 생각하며 ‘52주제 성경공부’ 라는걸 만들었다가 졸지에 이른바 유명 저자가 되고 말았다. 제일 놀란 건 나 자신.
그런 연유 등으로 총회 교육국이라는 ‘엄청난’ 곳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다 공부 더 하려고 한다는 친구 따라 아신대 대학원 시험장에 동행했다가 덜컥 그는 떨어지고 나는 붙게 되었다(아마도... 시험관이 실수했을 것이다^-^).
그래서... 하기 싫은 공부를 더하게 되었다.
교목으로 일하게 되면서 많은 단체와 교회의 강의를 맡게 되었다.
나도 모르는새 교회 교육, 청소년 교육의 전문가로 소개되고 있었다(정말 나는 그 분야의 탁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름철에는 각 노회 강습회의 ‘단골 강사’ 중의 하나가 되었다. 시간이 겹쳐 사양 할 수 밖에 없는 경우들이 다발했다.
이게 어쩌다 이렇게 까지 됐을까? ‘잘 나가는 구나’ - 하는 동료들의 빈정거림.
뭐든 첫 걸음이 어렵지-내딛고 보면 쉬워진다. 그간 이래저래 쓴 책들이 숫자를 세지 않기로 할만큼 많아지기도 했다.
교목 6년 동안 거의 내내 떠맡겨진 교회 담임을 계속하게 되었다. 저녁들의 강의는 줄을 잇고...
그러던 40세- 그 해 생일 날 나는 신촌 세브란스 병실에 던저져 있었다. 내 발로 걸어 나갈 수 있을까... 막연한 불안감 속에 각종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과는 - 일에 눌려 탈진. 이러다 죽는구나... 모든 일을 중단하고 외국으로 떠나는 결정에는 아내의 몫이 컸다.
신기하게도 나는 신학교를 다니는 동안 해외 유학이나 선교사 같은 것은 생각도 못해봤다. 그건 저 총명하고 뛰어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요 나는 내 앞의 일이나 해야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도 엉뚱한 이유로 비행기를 타게 될 줄이야.
그리고 영국.
말로만 듣던 기독교의 본산지(?) 유럽의 신학교를 맛보게 하셨다.
한국에 기독교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 해인 1884년에 설립되었다는 크리프 칼리지. 그곳은 학생 60명에 20여명 가까운 스태프들이 같이 공동 생활하는 학교였다. 마치 중세의 수도원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 명단을 첵크하는 새벽 예배로 부터...
그러던 중, 뜻밖에 90마일이나 이격된 곳의 한인 교회를 개척하게 되면서 한 학기로 마감해야 했으나 값진 경험의 날 들이었다.
그리고 일년 여를 즐기게 되었던... 카펜웨이 바이블 스쿨에서의 성경 새로 보기.
월요일 새벽에 가서 기숙사 생활 하다가 목요일 밤늦게 돌아왔다. 왜 하필이면 그 거리가 ‘155마일’이었는지.
그 고속도로를 달리며 나는 조국을 생각했다.
그 수많은 피부 색깔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엣세이를 밀쳐놓고 드넓은 초원을 홀로 걸으며 히죽이며 웃던 일. 감사함으로.
... 내게 어쩌다 이런 시간들이 주어질 수 있을까.
그 동안 어렵게 끌어온 미국 버지니아 리버티의 논문도 잘하면 끝낼 수 있을 지 모른다. 그러면 감히 목회학 박사 학위를 얻을 수도 모른다. 정말 분에 넘친다( 필자 주: 당시 논문 중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목회가 뭔지 모른다.
해외 생활은 2년이면 족하다고 작정 했었다. 그런데 영국에서 겨울을 다섯 번을 지내었다.
동안 코벤트리 한인교회는 건강하게 자라갔다. '이 교회가 자리잡히면 돌아가게해 주십시오...'
어떻게 간다? 이 목양지에만 전념하다가 누군가, 어느 교횐가가 뒷덜미를 당기면 가자! ... 이건 너무나 막연한 것 아닐까? 그러나 때의 결정을 내가 하지 않기로 하자.
그렇게 결단한 데는 이런 연유가 있다.
첫째, 본시 내게는 목회자가 마치 사원 공채하는 것 마냥 줄을 서서 심사 받는 일에 대한 불편함이 있다. 더구나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목회자 초빙 관행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왔었기 때문.
또 하나는, 내가 이 교회의 목회자로 있으면서 저 쪽을 쳐다보고 다리를 놓고 이력서를 보내고 하는 일이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게 해서들 자기가 원하는 교회로도 간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내게는 그게 뭔가 반듯하지 않다고 여겨졌던 것뿐이다.
다윗을 떠올렸다. 형들이 왕이 되보려고 우아한 차림으로 선지자 앞에 줄을 대고 있는 그 시간- 다윗은 양을 지키고 있었다. 외떨어진 들판에서.
나도 그러자.
어디 감히 그에게 견주겠는가. 그러나 원리는 동일하리라.
그래서 한국의 교회나 안면 있는 사람들에게 다리 놓는 일을 중단했다. 이 결단에는 아내의 조언이 주효했다.
조급함은 내려놓기로 했다.
그리고 2000년.
코벤트리 한인 교회는 급속히 견실해졌다. 풀타임 목회자를 모실만 해졌다. 6개처의 선교구제를 어려움 없이 해내게 되었다. 성도들도 자랐고 아름다와졌다.
이 즈음 서울의 한 교회가 ‘강청’을 해왔다. 봉천동...
가서 ‘누릴 수’ 있는 교회는 아니다. 아직도 상가 건물을 벗어나지 못한 교회.
그런데 근자의 런던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들은 음성.
‘오늘날 남이 이루어놓은 교회 찾아 누리려는 목사들이 많습니다. 내가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지 말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십시오’.
아, 내게 주시는 소리일까.
존경하는 모 목사님의 오래전의 언질, ‘이목사는 우리 교회 후임 0순위야’ ... 그 소리는 덮어두기로 하자...
그리고 이 아담한 목양지의 부름에 순종하자.
조국 교회의 한 모퉁이에서 내가 할 일은 과연 무엇일까.....
이제까지
... 나의 글 속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지 않았다.
이는 마치 에스더서가 그렇듯이, 그 모든 일 그 모든 진행 뒤에 바로 그분 '하나님이 계셨다'고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어찌 우리 생의 한 순간이라도 한 구석이라도 하나님과 무관한 것이 있으리요.
그렇잖으면 어찌 보령 골짜기에서 하늘만 쳐다보며 자랐던 아이가 이 영국에까지 와 있겠는가.
어찌 목사가 되어 이 영광스런 길을 갈 수 있겠는가.
이제까지 내 삶의 주변에 있었던 모든 이들께 사랑을 전하고 싶다.
모든 것이 분에 넘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2000년 1월
그리스도의 작디 작은 종 이진우.
2월 25일 예배중의 이임사
한반도의 대동강가에 토마스(Robert J, Thomas)목사가 순교의 피를 흘린지 134년이 지났습니다.
‘교회는 순교자의 피 위에 성장한다’는 터둘리안의 말이 맞다면, 한국교회는 토마스목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영국에서 보낸 선교사 입니다.
또한 1904년에 일어난 웨일즈 대부흥 운동은 곧바로 한국의 1907년의 대부흥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영국 교회에 많은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는 말이지요.
우리 교회가 이 미들랜드의 코벤트리에 자리한지 3년반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영국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또 영국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가 시작된 이래 이 교회당 건물을 함께 쓰도록 한 이 홀리헤드로드 교회는 우리의 형제입니다.
저는 오늘 날자로 이 코벤트리 한인교회의 담임 목사직을 사임 합니다.
그러면서 많은 감사한 마음이 솟아 오릅니다.
첫째는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감사입니다. 모든 영광을 그에게 돌림이 마땅합니다. 그의 강권적인 은혜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그의 교회가 이토록 아름답게 설 수가 있겟습니까. 바울의 말대로, 나의 나됨이 있다면, 오늘 제가 받을 찬사가 있다면 그것은 그분의 은혜일 뿐입니다. 앞으로도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이 땅에 펼치는 일을 계속해야 할 것 입니다.
둘째는 이 교회의 한 지체인 교우들께 대한 감사입니다.
그 동안 교회의 역사 속에 많은 교우들이 함게 했습니다, 지금은 한국에 돌아가 있는 교우들, 그리고 여기 함께한 모든 교우들에게 사랑을 전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후 힘차게 일 할 이석헌 목사님을 후임으로 모시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일생 동안 이 코벤트리교회는 저의 자랑이 될것입니다.
앞으로 제가 섬길 서울의 교회와는 자매교회로서 서로 아름다운 관계를 맺어갈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09년 최근에 보내온 사진
코벤트리 한인 교회에
지난 9월 26일자로 새로이 오원식 목사님이
담임 목사님으로 취임하셨습니다.
교회의 큰 부흥과 발전을 함께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