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을 위한 일편단심...
손종국 목사를 일컬음이다.
오래 전 내가 교목으로 생활 할 때
그는 자신이 시작한 청소년 선교단체를 일구기 시작했다.
'한국 청소년 교육선교회'
그 즈음 어느 해인가는
대구 지역의 SFC집회를 갔었다.
나는 고등부 연합수련회 강사로
그는 중등부 강사로 왔었다.
하필... 한 호텔에 묵게되어 거기서 만났다!
나는
그 후 청소년들의 '곁'을 떠났다.
해외로 그리고 현장 목회로.
그러나 그는 줄곧 거기 남았다.
그저 교회 목회 외에는 목회가 아닌 것처럼 아는 한국 기독교계의 이해의 척박함에도
그는 거기서 견뎌냈다.
이른바 배고프고 외로운 현장이랄까...
우리네 세상은
그래도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 있음으로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닐까.
오늘도 그는 '청사람 마중물'이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보내왔다.
어린시절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천막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던 경험이 있다. 신발을 잃어버릴까봐 신발주머니를 나누어 주었고 마루바닥 같은 곳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훗날 6년이 지나서 가보니 교회는 없어졌다.
아버님이 사업에 실패해서 낙향하실 때 새롭게 교회생활을 하였다. 낮예배에서는 예배를 드리고 주일과 수요일 오후예배에는 성경이야기 그리고 동화를 들려주었던 거 같다. 참새가 종에 몸을 부딪혀 경종을 울렸다는 동화가 생각이 난다. 예배를 마치고 30분 걸려 집으로 오는데 깜깜했던 기억도 있다. 두손을 불끈 쥐고 무서움을 참으며 집으로 달려오기도 했는데 왜 그렇게 어두웠는지 이해가 안된다. 금요 구역예배에는 옆집 집사님의 아들을 따라 갔다가 떡이나 수박, 아이스케키를 얻어 먹은 기억도 있다.
후에 순복음 서대문교회를 거쳐 새한교회에 정착하여 주님을 만나고 신학을 하기로 작정하고 총신에 입학하고 대학부 임원도 하고. 내가 아는 교회학교는 이런 경험들이다. 그리고 그 경험에 나름대로의 지식을 담아 교육전도사 일을 하고 선교회를 맡기까지 하였다. 지금도 1975년과 76년의 설교와 수련회인도를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래서 아마추어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그 때 중2였던 한 남학생이 훗날 총신신대원에서 강의할 때 날 찾아와서 나 때문에 신학을 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하나님은 부족하더라도 나름대로 사용하시나 보다.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공부하면서 교회학교의 역사에 대해서 교훈을 얻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과거 선진들의 사역 속에서 나와는 다른 전문가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전문성이 한국 교회교육을 발전시킬 것이라는 확신을 하게 된다. 다시 한번 도전을 받고 싶다. 우리 함께.
한국의 초기 주일 학교
1885년 3월 5일, 일본에 있는 선교사 매클레이(R. S. Maclay)의 집에서는 장로교의 언더우드(H. G. Underwood), 북감리 교회의 아펜젤러(H. G. Apppenzeller),스크랜튼(Mrs. M. F. Scranton) 등이 모여서 제1회 선교사 회의를 개최하고 선교 사업에 대한 여러 가지를 논의하였다. 그들은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이던 이수정(李樹庭), 박영효(朴泳孝) 등에게 한국의 사정을 물었다. 이때 박영효는 이렇게 말했다.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할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 백성이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은 교육과 기독교입니다. 선교사들과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를 통해서 우리 백성을 교육하고 향상시켜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재래 종교는 지금 기운이 다했습니다. 이 백성을 기독교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길은 지금 환히 열려 있습니다. 우리가 합법적인 개혁을 하기 이전에 반드시 우리는 교육과 기독교화를 서둘러야만 하겠습니다.
천주교의 박해와 쇄국 정책으로 무지와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은자의 나라(hermit nation)라고 불리던 이 땅은 개화파의 한 명이었던 박영효의 말처럼 교육과 기독교화의 새로운 시대를 향해 드디어 기지개를 켜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1885년 4월 5일,일본 나가사끼(長崎) 항구를 떠나 제물포에 도착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부부에 의해 감격의 부활절 아침,하나님의 선교에 이 나라도 그 발걸음을 내디디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와의 접촉은 물론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1832 년 순조(純祖) 32년에 독일인 선교사 구출라프(Carl Gutzlaff)가 전도할 목적으로 서해안에 와서 약 40여 일간 한문 성경을 가르친 적도 있다.
한국 선교를 위한 본격적인 움직임의 계기가 되었던 것은 한미 수호 조약이 체결된 후,보빙 대사(報聘大使) 민영익(聞泳朔) 둥의 일행이 센프란시스코로부터 워싱톤으로 향하여 대륙을 횡단하던 기차 안에서 볼티모어에 있는 가우쳐 여자 대학교의 총장인 가우쳐(John F. Goucher) 박사를 만난 것으로 지적할 수 있다. 이런 절차를 통해 한국에는 기독교의 보다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인 선교와 더불어 근대적 의미의 교육이 실시되게 된 것이다.
초기의 선교사들의 선교 사업의 목적은 단순한 교회 확장만이 아니라 민족의 정신과 생활을 개혁시키겠다는 보다 큰 의미의 전도자의 의지와 열정으로 넘쳐 있었다. 독립신문 1896 년 8월 20일에는 이러한 선교사들의 태도를 우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면서 이런 기록을 남겨 두고 있다.
(기독교가) 바라는 것은 불쌍한 조선 백성들이 자기 나라 사람과 같이 나라 안에 옳은 법률이 생기고 조선에 있는 상하 인민이 합심하여 나라를 보존하고 인민이 정돈되어 규모 있게 만사를 행하며 전 국민이 서로 생각하기를 형제와 같이 하며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가르침을 본받으라 함이니 이 본의를 생각 하면 어찌 감격하지 않으리오.
아편젤러 목사가 1885년 배재 학당(지금의 배재 중고등 학교)을 설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곳곳에 선교사들에 의한 사립 학교가 시작되어 이 나라와 민족의 새로운 지도자를 양성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황해도 송천(松川)에 세워진 소래 장로교회, 평양의 장대현(章台視) 장로교회,서울의 정동 제일 감리교회,장로교의 새문안 교회 등이 곳곳에 세워지기 시작하면서 복음의 씨앗이 이 민족의 역사 속에 뿌려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학교와 교회의 설립이 초기 선교 사업에서는 모두 교육적인 의미를 띠는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이미 아펜젤러, 언더우드가 당시 주한 미국 공사였던 푸트(Lucious H. Foote)에게,교육과 선교의 의미를 하나로 표명하면서,지금은 선교 사업이 아니라 교육 사업을 먼저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질문한 것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에 주일 학교가 처음 소개되었을 때는 1780년의 영국적인 운동으로 소개되는 것보다는 미국의 주일 학교 운동이 보여 주는 것처럼 교회의 전도 사업의 하나로서 연령층이 낮은 어린이들을 상대하여 교육시키는 실용적인 측면에서 소개된 감이 없지 않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초기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주일 학교와 사립 학교에서의 교육은 그 성격이 달랐다고 하는 점이다.
선교사들에 의하여 설립된 기독교 계통의 학교들은 학교를 중심한 종교 교육 운동이었다. 종교가 중심이 아니고 문화가 중심이고 기독교는 교육의 이념을 제공해 주는 근대적 교육 운동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초기 선교사들은 학교를 먼저 세우고 후에 교회를 세웠다. 선교사들의 학교 교육은 민족적인 결단의 역사적 상황의 고난을 맞아 더욱 치열한 민족 지도자의 양성이라는,그리하여 민족의 자유를 향한 인격의 도야를 통해 유지되고 발전되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학교인 배재 학당의 설립자 아펜젤러 목사는 배재 학교의 건학 정신을,“우리는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우리 학교의 일꾼을 기르려는 것이 아니라,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라”고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선교사들이 학교 교육을 통해 제시하려던 것이라 고할 수 있다.
한편, 한국 교회의 성장에 있어서는 주일 학교운동과 1890년 7명으로 시작된 사경회(bible class)는 사랑방 교육(one room school)으로 발전하였다.
최초의 주일 학교는 1888년 1월 15일 이화 학당에서 12명의 학생과 3명의 부인이 모여 스크랜튼 부인의 지도 아래 성경 공부를 한 것이라고 한다. 1896년 4월 21일의 「독립 신문」논설은 여자들의 교육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데,주일 학교의 시작이 여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 논설은 이렇게 그 필요성을 강조한다.
세상에 불쌍한 인생은 조선 녀편네니,우리가 오늘날 이 불쌍한 네편네들을 위하여 조선 인민에게 말하노라. 녀편네가 사나이 보다 조금도 낮은 인생이 아닌데 사나이들이 천대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나이들이 문명 개화가 못 되어 이치와 인정은 생각치 않고,다만 자기의 팔심만 믿고 압제하려는 것이니 어찌 야만에서 다름이 있으리요…조선 부인네들도 차차 학문이 높아지고 지식이 넓어지면 부인의 권리가 사나이 권리와 같은 줄을 알고 무리한 사나이들을 제어하는 방법을 알리라. 그러기에 우리는 부인네들께 전하오니,아무쪼록 학문을 높이 배워 사나이들보다 행실도 더 높고 지식도 더 넓혀 부인의 권리를 찾아라.
이러한 신문의 논설은 이미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가 개화되어 가고 있음올 전제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사실 주일 학교 운동에 있어서도 이때쯤에는,1897년 평양에 5개의 주일 학교가 있었으며 필요한 교육 자료는 인쇄되어 사용되고 있었다. 1900년에 주일 학교가 보급되긴 했는데 가르칠 만한 교사가 없었기 때문에 감리교 선교사 노블 부인이 평양 남산재 교회에 양성부를 두었고,1903년에 거기서 배출된 교사들이 나온 다음부터는 더 활발하게 퍼지게 되었 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점차로 무르익고 확대되기 시작하였을 1905년 6월 드디어 장로교,감리교 연합회의가 감리교의 벙커 선교사의 집에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그동안 각 교회에서 개별적으로 시작되었던 주일 학교는 1905년 9월 15 일에,선교 연합 공의회(Federal Council of Mission) 안에 주일 학교 위원회가 선교사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따라서 한국에서 1905년은 조직적인 기독교 교육 운동의 첫 해라고 부른다. 이 위원회의 목적은 기독교 교육을 주로 하는 각 선교회 선교사간의 친목과 동시에 주일 학교 교육을 위한 교재를 발간하는 것이었다.
6년이 지난 1911년에 선교사 중심의 위원회는,현순(玄循) 목사,한석원(韓錫源) 목사,남궁혁(南宮赫) 목사,홍병선(洪秉斑) 목사를 포함하여 한국인도 위원으로 선출하였다. 위원회에서는 통일 공과를 편집하여「주일 학교 공부」 라는 이름으로 출간하였다.
1908년 4월에는 세계 주일 학교 연합회의 브라운(Brown)과 해밀톤(Hamilton)이 방한했는데 이것은 한국 주일 학교 운동을 위한 본격적인 세계적 교류의 출발이다.
1911년에는 브라운이 다시 내한하여 프로젝트의 하나로 「세계 주일 학교 통일공과」를 출판하게 되었고,1913년 세계 주일 학교 연합회 실행 총무인 하인쯔(H. J. Heinz)가 내한 하였다. 이를 환영하는 서울 시내 주일 학교 대회를 경무대 앞마당에서 가졌는데 사회는 언더우드(元在尤) 박사가 하였고 모인 인원은 14,200 명 정도가 되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1907년 5월에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열린 제5회 세계 주일 학교 대회에 윤치호 선생이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국제적인 교류가 계속되기 시작하여 1922년 11월 성서 공회에서 "조선 주일 학교 연합회’’가 정식으로 조직되었다. 이 조선 주일 학교 연합회는 4년에 한 번씩 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여 1933년까지 계속하여 오다가 1938년 6월 21일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간섭과 탄압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1921년에는 전국 주일 학교 대회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개최되었다. 서울에서 열린 이 대회는 서울 YMCA,태화 여자관, 장로교의 승동 교회, 감리교의 중앙 교회에서 남궁혁 박사를 대회장으로 약 이천여 명의 희원이 참석하였는데 대회의 총무로 일을 꾸려간 사람은 한석원 목사였다.
1925년 서울,1929년 평양, 1934년 대구 등에서 각기 주일 학교 대회를 갖게 되었으며 1924년에는 조선 기독교 연합회가 탄생하여 한국 에규메니칼 운동과 불원간 있을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the church of christ in Korea)로의 꿈올 겨냥한 연합운동체가 출범하기도 하였다.
1922년 최초의 여름 성경 학교가 평양 선천에서 마포 삼열 선교사의 부인이 시작한 이래 급속히 전국에 전파되었다. 조선 주일 학교 연합회는 장로교가 중심이 되어있었던 관계로 사실 장로교 교육부와 연합회 사업을 서로 구분 할 수 없을 정도로 장로교 중심으로 발전되어 나왔다.
여기서 1928년 감리교는 조선 주일 학교 연합회의 제7회 총회를 맞이하는 해에 "감리회 종교 교육 협회”를 조직하여 래시(John Lacy)선교사와 변성옥(邊成玉) 목사가 지도하였다. 이 기관이 지금의 감리교 총리원 교육국의 시작이 된다.
1933년 연합회 제12회 총회를 맞이하는 해에 장로교도 역시 독자적인 종교 교육부로 발전하여 이후 주일 학교 운동은 교파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936년 1월 10일의 감리 회보가 전하는 것을 보면 감리교는 주일 학교의 3대 표어를 채택하였다. 그것은 첫째, 주일 학교는 교회의 기초다(교회가 영구히 서 나가려면 이 교회를 지고 나갈 제 2세 교인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오늘 의 교인과 아울러 내일의 교인을 양성하는 기관이 주일 학 교다). 둘째,교회마다 주일 학교를 세우자(주일 학교가 교회의 기초인 만큼 주일 학교가 없는 교회는 장래는 물론,오늘도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기 존속을 위하여 주일 학교를 조직해야만 한다). 세째,교인마다 학생이 되자(교인이란 말은 입교인,학습인,원입인 또는 이들의 자녀를 통칭하는 말인데,교회는 모든 출석하는 이들을 가르치는 곳이다. 그러므로 교인마다 먼저 나와 교육을 받고 자녀를 보내어 종교 교육을 받게 하고 그 다음에 불신자와 자녀를 청하여 교육을 받게 해야 한다).
또 1933년 8월 26 일 교육국에서는 주일 학교 진흥 주일로 9월 세째 주일을 지킬 것을 결정 통고하면서 직원 위임식과 함께 진흥 주일 준수,그리고 졸업식을 아울러 강조하게 된다. 특별히 진흥 주일에 대하여는 몇 가지 특기할 사 항이 있으니 지도력 양성과 교사 예비 교육 과정에서 교사 계속 과정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 적극적인 교육 프로그램의 일면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30년대 이후 일제의 극심한 압제는,민족의 독립 운동적 차원에서의 모든 활동올 둔화시켰으며 주일 학교 운동도 그러한 여파를 받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미 지적한 대로 주일 학교 연합회도 해산당하고 말았다. 따라서 주일 학교 운동은 어린이 심리학과 어린이 놀이 방법론에 강조를 두고 있는 주일 학교 운동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누구 든지 이 성경올 읽고 그대로 행하는 자는 모두 다 훌륭한 인물이 되었으며, 성경대로 행하는 나라는 부강하고 문명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주일 학교운동이 민족적인 현장성을 상실한 전도용 프로그램으로 이용되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그것이 한 교회 한 교회의 공동체적 "장”에는 아무런 뿌리를 박지 못한 한국 기독교 교육의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고 지적할 수 있다.
더우기 1911년부터 선교사들에 의하여 대체적으로 주도 되어 오던 주일 학교 운동은 1940년 태평양 전쟁으로 인하여 선교사들이 자신의 나라로 귀국하자 사업 전체가 더욱 침체하게 되었다.
1945년 민족적인 구속의 은총이라고 고백하는 해방 이후 주일 학교 운동의 활성화가 다시 시도되긴 하였으나 여러 문제들이 노출되어 있었다.
각 교파간의 불일치,신사 참배를 둘러싼 신앙의 극한적 대립,교회 자체의 주일 학교 교육에의 이해 부족 등의 난관에도 불구하고 1948년 조선 주일 학교 연합회가 한국 기독교 교육 협회로 그 이름을 바꾸고,주일 학교를 교회 학교로 사용하면서 "기독교 교육”이라는 용어가 쓰여지기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1950년의 민족적 분단 체제의 비극적 전쟁이 시작되고,한국 교회의 신앙을 비현실적이고 타계적인 것,부흥회적인 열광주의으로 몰고 가 교회의 교육적 본질을 더 혼란으로 몰아 넣기도 했다.
혼란기의 모든 사정의 악화에도 불구하고,1954년 이후 몇몇 외국 전문 기독교 교육자들의 손에 의해 계단 공과가 시도되었으나 불행히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오히려 한국 교회에 있어서의 기독교 교육과 교회 학교 의 새로운 신학적 접근은 은준관 박사가 말하는 대로 "한국 기독교 교육의 사상 정립의 개화기”로서의 1960년 이후 라고 보아야 한다. 바로 여기서부터 주일 학교가 교회 학교로서의 학문적 자기 자리를 세워 나가면서 기독교 교육의 현실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가능성으로 도약하게 되는 것이다. 평신도 중심의 교회 학교 교육에 대한 교회의 관심과 책임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공동체 생명력 속에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할 때가 되었다.
선교사의 주일 학교 운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감사하면서도 이제는 그 선교사들의 마력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신앙의 결산을 하면서 살 수 있는 자가 될 수 있도록 주일 학교 교육의 방향을 바꾸어야 할 때가 왔다는 반성과 각오가 한국 교회 학교의 미래를 향해 놓여져 있는 것이다.
청소년교육선교회
http://www.tem.or.kr/tem_1.htm
안녕하세요
청소년은 가정과 국가와 교회의 미래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들"(살전 2:12)로 양육하기 위해서 우리 어른들이 늘 깨어서 진리로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살전 2:11)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와 교사는 청소년들을 "노엽게 하지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가르치도록"(엡 6:4)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알고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는 사람, 이 세대를 본 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며 기뻐하시며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헌신하는 사람이 진정한 비전의 소유자이고 이러한 비전을 갖는 청소년은 늘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는 청소년사역의 기초작업으로 청소년 일반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신앙과 청소년일반, 교회교육이론, 가정과 학교생활, 훈련프로그램, 20세기와 21세기의 사회 제반 영역 등에 대하여 문헌연구와 기존 학술단체들의 연구성과를 검토하고 교회교육의 현장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실시하여 교회에서 활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 개발과 교육자료를 제작하며 지도자를 훈련할 수 있는 자료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청소년들에게 복음 전하여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일군으로 헌신하는 그 날이 올 때까지 저희는 여러분과 함께 동역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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