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서들

'21C 평신도 훈련'을 펴내며

johnleejw 2009. 7. 20. 13:06

 

 

생각1. 

미국의 윌로우크릭 교회를 방문했던 것이 1993년도 여름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른 일로 시카고를 들렀다가 호기심을 못 이기어 찾아갔었다. 시간이 주일 저녁이었는데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주일 집회의 뒷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생동감이 충만했다. 교회당과 시설들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당시 한국교회에 알려지기 시작하던 교회에 대한 궁금증은 ‘거의’ 풀리는 것만 같았다.

미국 내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던 이 교회는 90년대 중반부터 한국의 D교회를 통하여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교회의 ‘구도자 예배’를 기점으로 열린 예배와 시스템들이 교회들에 수입되었다. 담임 빌 하이벨스 목사는 교회 성장을 꿈꾸는 전 세계 교회 목사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한국의 많은 교회들도 이 교회야 말로 이 시대에 주님의 내놓으신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교회가 얼마 전 깜짝 놀랄만한 선언을 했다.
지난 32년 사역의 중심이 되는 철학과 그것을 구현하는 프로그램들을 점검한  책 <Reveal: Where Are You?>를 펴내었는데, 거기서 담임 빌 하이벨스 목사는 "지금까지의 사역 방향에 뭔가 큰 문제가 있다"고 고백했던 것이다. 그들은 “숫자로는 성공을 했는지 몰라도, 예수 그리스의 참된 제자를 만드는 일에는 실패했다”고도 했다. 
이들이 발견한 핵심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교회에 수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교인들로 하여금 신앙적인 활동을 하도록 이끌었지만, 그것이 영적인 성숙함을 보장해주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교회는 지금까지 교인들의 신앙 성숙을 위해서 예배, 성경공부, 소그룹, 자원봉사, 전도 등 엄청나게 많은 프로그램을 돌렸다. 교인들은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여했고, 교회는 날로 성장했다. 하지만 교인들이 하나님과 이웃을 ‘정말로’ 사랑하고 있는가. 내적으로 제대로 여물어가고 있는가. 그 물음에 자신 있게 ‘예스’라고 대답할 수 없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들은 다시금,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해야 한다고 고백한 것이다. 

윌로우크릭 교회의 처절한 성찰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저들은 교회 안에서의 영적 활동이 개인의 영적 성숙도와 함께 상승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십일조를 하고 전도를 하고 봉사를 하는 영적 활동과, 하나님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영적 성숙함은 궤를 같이하지 않았다.   
그래서 반성적인 저들의 진단은- 교인들을 온전한 주님의 제자로 양육하기 위해서는 프로그램에 의존하던 목회방식을 버리고, 스스로 성경을 읽고 하나님과 단 둘이 만나는 영적 교제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그들의 그런 고민을 바라보며, 우리 자신을 돌아본다.
지금 우리 한국 교회는 수많은 프로그램 과잉증에 걸려있는 듯하다. 그래서 정체된 교회 성장을 탈피하기 위한 맹목적적 열망이 목회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그렇게 말들은 안하지만 역시 ‘꿩 잡는 게 매’라는 것이 목회 현장의 은밀한 원리이다. 

방향을 상실한 배가 첫 번째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지도를 다시 보는 것이다.
지엽적인 논란을 벗어나서 우리는 지금 교회의 본질을 다시금 생각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성경으로 돌아가서 깊은 고민을 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란 과연 무엇인가. 이 세상 속에 교회를 두시는 주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성도란 과연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생각 2. 

한때 대선 후보로 까지 하마평에 오르던 존경받는 한 원로의 대담 내용이다. ‘우리 사회를 보면 각론은 없고 총론만 있어요. 명분을 내세우거나 거대 담론, 이념화를 너무 중시하는 것 같아요. 저는 총론주의자보다는 각론 주의자입니다. 각론을 하다보면 저절로 총론이 만들어질 수 있거든요’. 

교회는 어떠한가. 원론에만 충실하여 복음을 정확히 이해하기만 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잘 해나갈 수 있는 것인가? 기독교인이 성령 충만하기만 하면 다른 문제는 다 풀리는가?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주일 예배에서 거룩하게 예배하던 저들이 생활 현장에서는 숨어있거나 자포자기식으로 살아가는 이중적 존재로 살도록 방치하고 있지는 않은가. 
군인은 체력이 기본이다. 그래서 새벽 점호 때부터 구보를 한다. 그러나 체력만 월등하다고 효율적인 군인이 되는가? 아니다. 각개 전투를 배우고 사격기술을 배우고 그래야 한다.
신자들이 주일 예배에서 감동을 받고만 나가면 월요일의 직장생활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챤 직장인으로서의 훈련이 따로 필요한 것이다. 사변적인 구원론만 공부 한다고 가정에서의 문제가 풀리는 것이 아니다. 주안에서의 부모 노릇, 남편 노릇에 대해서는 따로 훈련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으로 지금 한국교회의 훈련 과정이나 성경공부 내용을 분석해보라. 모두가 그저 총론에 머무는 수준이다. 원론만 다룬다. 그러나 뭐든지 실천 가능한 것이 온전한 진리가 아니겠는가. 
(요일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한국 교회 전반의 훈련 커리의 문제를 더 지적해보자.
우리의 훈련 내용은 한편으로 치우쳐 있다. 다분히 의도적이다. 무슨 말인가. 우리는 지금 ‘충실한 교인 만들기’에 온 힘을 쏟고 있는 형국이란 말이다. 교인을 교회 내에서 충성스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인은 진정 그보다 넓은 개념이 아니겠는가.

내가 주일학교 교사 세미나에서 자주 강조하는 말이 있다. ‘우리는 이 아이들 키워서 집사 만들기, 장로 만들기... 그거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영역에 나가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높이는 승리자들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 교회는 성도들을 훈련시켜 교회에서나 충성스런 교인 만들기를 하는 것일까?
우리 신앙인의 삶이란 기독교 진리를 바탕으로 한 제 영역에서의 삶이다. 교회, 가정, 동네, 직장, 사회 그리고 이 지구촌 시대의 세계인으로서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네 교육 훈련은 신앙의 기본에서 출발하여 교회에 까지 온다. 그리고는 거기서 멈춘다. 아니 거기에만 집중되어 있다. 즉 우리는 내 교회 교인 만들기에만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이다. 
‘이 교회에 뼈를 묻고 목사님을 위해서는 죽을 수도 있는...’ 내 교회 열성분자를 만드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제자 만들기인가?
진정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들려는 것일까. 목회자의 제자를 만들려는 것일까. 주님의 사람이기를 원하는가 내 사람이기를 원하는가. 
지금은 사사시대와 방불하다. 이단 교주만 이단이 아니다. 교인 수만 늘 수 있다면, 가시적 교회 성장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는 목회자라면 가히 이단교주와 다를 바 없지 않겠는가.

나 자신을 비롯한 목회자들은 성도들을 ‘교회의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교회에 충실한 교인 만들기에 집중하게 되어 있다.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고 교회 내 모임에 충실하고 교회 봉사를 모든 것에 우선하도록 가르치려한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간다면 세상에서 교회로 전도를 해오면 금상첨화이다.

그래서 근자에 가장 인기를 얻는 훈련 과정은 바로 새로 들어온 신자를 속성 양육하여 전도하게 만드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에도 부합하고 ‘정체의 늪에 빠진’ 교회를 구하는 명분 있는 몰아 부침 아니겠는가. 더구나 갓 세상에서 들어 온 사람의 교제권이 더 비신자들과 가깝고 그로 인한 전도의 효율성이 저들 새신자에 있음에랴.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인가?? 한 사람이 성도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답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병아리가 부화하려면 반드시 알속에서 21일간 따뜻한 보호를 받아야 한다. 만일 하루라도 일찌 새끼를 꺼내면 그 병아리는 죽고 만다. 
신자가 신자로 구실한다는 것이 단지 정형화되고 속성화된 어떤 과정으로 가능한가?

우리는 민족적 성향으로 조급한 면이 있다. 목회자들도 교인들이 그렇게 급성장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들판의 벼가 익는 데에도 과정이 있고 시간이 필요하다. 여름날의 뜨거운 폭양도 필요하고 배아기의 풍요로운 비도 있어야 한다. 어찌 몇 주 만에 제자가 되며 그것도 지루하여 단 수개월 만에 사도가 될 수 있는가.

구원과 성화에 탁월한 설교가인 박영선 목사는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구원 받고 은혜 받은 자가 신앙 생할의 영역을 제한시키는 것을 경고하며 “일주일에 전도 두 번하고 성경 열 번 읽고 하는 식으로 절망이 필요 없는 것으로 자신의 잣대를 스스로 만들어서 안심하시면 안됩니다. 성화라는 것은 그것보다 훨씬 우리 본질의 깊은 데를 꿰뚫어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외면하고 혼자 살려는 마음을 제거하는 싸움입니다”. 
어떤 깨달음의 한 조각을 붙들고는 난 이제 알았어 난 전도하러 갈거야 그러며 뛰어나갈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칼 윌슨이 제시한 소위 신앙 성장 과정이라는 것을 참조해보자.
1단계 회개와 신앙
2  그리스도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
3  전도훈련과 은사의 감사
4  지도자 양성과 하나님의 감독
5  재평가와 분리
6  참여와 파견
7  변화된 삶과  범 세계에 대한 도전.

그의 논리에 의한다면, 우리 한국교회의 일반적 훈련은 3단계까지 와서 멈추는 형국이다.
분명한 명제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제자가 돼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가 그리스도의 제자인가?  
모여서 성경 공부만 하는 것을 훈련이라고 생각해도 좋은가? 그건 제자훈련이 아니다. 
기도훈련, 봉사훈련, 영성훈련, 드리는 훈련, 인내 훈련, 전도훈련, 공동체 훈련...이 다 포함돼야 훈련이다. 
이는 어쩌면 한국교회의 훈련이라는 개념 자체가, 학원 캠퍼스 선교단체의 훈련과정을 모태로 하여 발단된 것이기에 갖는 태생적 모양새인지도 모른다. 

 생각 3.

더 심각한 문제를 말해보자.
우리 개신교는 한국에서 이제껏 격어 보지 못했던 최고의 위기를 맞고 있다. 자칫하다가는 유럽의 교회처럼 예배당만 덩그라니 남고 교인들이 없어서 텅텅 빈 교회가 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아직도 생생한 아프간 선교지의 사건을 기억한다. 우리 교회들에게는 너무도 절박하고 곤혹스러웠던 시간들이었다. 선교의 가치를 내려놓을 수 없는 우리들 앞에 세상이 쏟아낸 비난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다. 거기서 목숨을 잃은 순결한 피의 가치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기 힘들었다. 

어안이 벙벙할 만큼 터져 나왔던 세간의 비난들, 신문과 방송에서 무차별 쏟아내던 교회에 대한 비판들...  마치 온 대한민국이 나서서 교회를 배척하는 것 같은 형국이 전개되었었다. 사람들은 이것이 서서히 축적되어 온 안티 기독교의 표출에 불과하다고 입을 모았다.

우리 개신교는 100년 역사 속에서 이 땅에서 핍박은 받은 적이 있으나 요즘처럼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어 본 적은 없다. 핍박을 받는 것과 욕을 먹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교회는 핍박 받을 때 힘들지만 오히려 성장하고 순수해 진다. 그러나 욕은 그와 다르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욕을 먹게 되기 시작하면 교회는 몰락하게 된다. 
우리 한국 개신교회는 지금 후자의 문제 앞에 서 있는 듯하다. 

인터넷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른다. 교회를 ‘집단’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기독교에 대하여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이다. 기독교 최고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세상은 더 이상 우리 기독교를 존중하지 않는다. 신뢰하지도 않는다.
저들은 교회와 교인들이 나라와 세상에 대한 소명감을 잊어버리고 자기 집단에만 집중하여 자기만 생각하고 아는 이기적인 집단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자, 그럼에도 교회는 어떠한가? 그저 교회 일에만 신경을 쏟고 있다. 교회에 충실한 교인을 만들어 내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 사회봉사를 해도 눈에 뜨게 의도적이다. 세상 사람들은 전도를 교회가 세 불리기를 하는 것으로 본다. 교회는 ‘자기들만의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비아냥한다. ‘교회? 너나 잘 하세요’.

수년전에 실시한 한미준-한국갤럽 리서치의 결과는 현대사회의 윤리문제 등에 있어서 신자와 비신자간에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나아가 교회에 대한 세상의 이미지는 부정적이라고 지목하였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 세상 속에서 교회가 보여야 할 최고의 가치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제자를 양육하려 하지 않는다. 조지 바나(George Barns)는 미국 기독교의 실패를,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2008년 봄, 세계화 시대의 신 7대 죄악을 교황청이 선정하여 기관지 ‘로세르 바토로 로마노’에 발표한 바 있다. 멈출 수 없는 세계화의 결과로 등장한 새로운 이슈들에 주목한 결과였다. 환경파괴, 윤리적 논란이 되는 과학 실험, 유전자 조작이나 배아훼손, 마약거래와 투약, 소수의 과도한 축재, 낙태, 아동 성범죄..
기존의 7대 죄악은 6세기 교회의 그레고리 1세가 정리한 것으로 정욕, 탐식, 탐욕, 나태, 분노 시기 교만 등이었다. 그런데 세상 변화를 보니 그 죄악도 성향이 바뀌더라는 것이다. 나름대로 주목할 부분이 있다. 
세상은 바뀌고 있고 교회는 이에 대처해야 한다는 점이다. 
천주교는 이 점에 있어서 눈을 뜨고 있는 셈이다.

생각 4.

 한국 사회는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진 사회이다.
한국의 교회에도 이 면에서는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소위 대형교회들의 상황과  중형, 소형 교회들의 상황은 천양지차이다.
물론 서울과 지방 도시 그리고 농어촌 교회의 상황도 전혀 딴판이다.
그러니 어찌 획일화된 교육과 훈련을 말할 수가 있겠는가.

자, 대형교회들은 다양한 훈련과정을 상설할 수 있다. 그러므로서 신자들이 신앙인으로 살아갈 다양한 양분을 공급할 수 있다(그렇다고 모든이가 그것을 원하며 참여하는 것은 아님).
  .... 직장인 학교, 선교과정, 결혼 예비학교, 가정 사역과정들, 찬양학교, 전도폭발훈련, 중보기도학교, 성경 통독학교, 크로스웨이, 벧엘..  어디 이 뿐이랴.

그러나 한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거의 80%가 200여명 미만의 교인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저들 80%의 교회에서는 사실 다양한 훈련 과정들을 병설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설사 만들어도 그게 유지될 확률은 거의 없다.

결국, 내가 고민하며 작업하는 이 새 제자훈련 과정에서 지향하는 바는 이 점이다.
기왕에 마련되는 제자 훈련 과정에서 성도들의 삶의 필수 부분들을 다루어야 한다! 이때에  다루어지지 않으면 거의 다시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는다!
그런데 그렇게 다양한 주제를 다루려 하다보니, 이 과정 내에서 심도 있게 모든 영역이 다루질 수는 없다. 그게 피할수 없는 약점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 기본 핵심은 짚자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과정을 지나면서 훈련생들에게 이런 분야들에 대한 신앙적 안목을 키워주며 나아가 그 책임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살게하자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래 이 교재가 원래 지향하는 방향은 ‘중소형 교회를 위한 제자훈련’이었다. 

결국 내가 생각하는 훈련 교재는 어떤 것인가? 
훈련은, 교회내부의 주제뿐만 아니라, 폭넓게 신앙인으로서의 삶의 제 영역이 고루 텃치 돼야한다. 
교재가 너무 사색적 사변이어서는 안 된다. 결국 선택된 소수 엘리트 교인만이 받을 수 있는 것이 훈련인가? 난이도를 낮춰야 한다. 
과제도 가능한 만큼 만 부여하고 그것을 철저히 관리하여 성취감을 높여야 한다. 
긴 시간 앉아 있어야 한다면 시간적으로 불가능한 맞벌이 부부나 본디 공부와는 상관없는 사람에게는 가혹한 일이다. 소요 시간도 줄이자. 

하여, 할수만 있으면 온 교우가 제외됨 없이 이 훈련을 거쳐가게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평생 심화과정으로 성경 그 자체를 계속 배워가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공부, 그 자체로 가득한 교인이 아니라, 삶을 살아내는 세상속의 증인을 세워가자는 것이다.


p.s

이 책은 그후 '21 평신도 훈련'이라는

         책자로 시중에 널리 퍼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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