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그리고 목양/건강한 교인이 알아야 할 200가지

목회자의 함정

johnleejw 2010. 10. 31. 16:02

목회자의 함정

아니, 목사님도?

 

아주 오래된 이야기이다.

다니던 직장을 내던지고 신학대학에 들어갔던 그해 여름에 나는 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갔었다. 고향 교회에는 열심있는 목회자가 부임해 와 수 년째 목회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뜻밖의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 목사가 야밤에 마을을 떠났으며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것이었다. 더구나 부인과 가족을 버리고 나이 차이가 많이 아는 처녀와 달아났다는 것이다.

 

이 소문은 조그만 마을을 가득 덮고 있었으며, 동네 사람들은 목사가 되려고 신학을 시작했다는 나마저 이상한 눈으로 보는 듯 했다.

내가 아는 바 그 목사는 호탕한 성품과 또 예리한 정의감 같은 것이 있었다. 또 그 쳐녀는 나도 익히 알고 있는 바 열성있는 주일학교 반사였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 있었던 것이다. 이제 교회는 문을 닫을 것이고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내 어머니의 말씀이었다.

 

“그 목사님 - 너무 사람이 좋아서 그랬어. 너무 좋다보니 그만 그런 실수를 한 것이지. 다 사람이니까…”

 

나는 그때부터, 오랜 세월을 신앙 속에서 살았던 분들의 생각을 무시하지 못한다. 그분들의 생각 속에는 어떤 ‘통찰력’같은 것들이있다. 그것은 책에서 빌려온 단편적인 조각들이 아니다. 오히려 체험에서 습득한 깊숙한 예지 같은 것이다. 그 목사가 부끄러운 도주를 한 뒤에도 하나님은 교향 마을에서 계속 역사하셨다. 사람들은 빨리도 그 상처를 잊고 교회로 모여들었다.

수년 후, 목사가 되어 집회 요청을 받아 고향 교회 강단에 섰을 때 나는 1층과 2층에 빼곡히 앉아 말씀을 기다리는 150여명의 성도들을 볼 수 있었다.

 

사람은 실패해도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신다. 사람의 어떠한 실수도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지는 못한다. 사람의 어떤한 범죄도 하나님을 놀라게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우리네 평신도는 다르다. 사람의 타락, 특히 교회 지도자의 타락은 저들을 당황케 만들며 배신감을 느끼게 만든다.

나는 미국에서 막 귀국한 젊은 교수가 저명한 미국 TV 설교가의 불륜을 몇 번씩이나 성토하던 것을 기억한다.

 

그는 자기가 본 지미 스와가드의 감동어린 몸짓, 그 눈물을 흘리며 외치던 설교를 회고하곤 했다. (그때가 짐 베이커, 지미 스와가드, 오랄 로버츠의 스캔들이 연속으로 터질 때였다.)

그러나 목회자의 타락 현상은 바다 건너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한국땅, 서울 안에서도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심심찮게 목사의 비리, 윤리적 타락, 심지어는 부동산 투기에 관한 소식을 듣고 있다. 매스컴이 극도로 발달한 오늘의 현실은 결코 옛날과 같지 않다. 갖가지 소문을 순식간에 온 나라에 퍼뜨려 놓기 떄문이다.

 

더구나 목사나 교회 지도자가 잘못을 저지르면 각종 신문기자들은 벌떼처럼 달려들어 모든 것을 파헤쳐 놓는다. 그것은 불신자들이나 교회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최대의 흥미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목사들의 타락은 세상 사람들의 죄책감을 덜어주는 구실도 한다. 자신들의 아주 말할 수 없는 타락된 생활을 “목사도 그랬다.”는 한 마디로 자위해 버리는 것이다.

 

어느 목사가 이렇게 저렇게 했더라는 소식은 저들의 탐욕을 한없이 정당화시켜주는 구실이 된다. 이 말은 이쪽의 죄를 저들의 과대 광고 때문에 합리화시키자는 뜻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필요 이상으로 확대되고 들춰지는 것이 교회 지도자의 범죄내지는 타락 사건이다. 하지만 이런 소식 앞에도 신실한 성도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크게 낙담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이 필요하고, 그래서 교회가 필요하고, 그래서 목회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기회를 깨어있는 성도들은 자신을 돌이켜 보는 기회로 삼는 것이다.

 

목회자도 그런 시험에 빠집니까?

이 질문 앞에 나는 그렇다라고 답할 뿐만 아니라, 목회자이기 때문에 빠질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사실, 사단은 어떻게 하면 저 증오스런 교회를 파괴할 수 있을까? 골몰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교회의 주일학교 아이를 시험들게 하는 것보다는 목사를 넘어뜨리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교회 지도자의 넘어짐은 온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사단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부추긴다. (요일 2:16)

이러한 간계는 이미 에덴에서부터 밝히 드러났다. 인류의 머리인 아담과 하와, - 그들에게 사단은 접근했다. 낙원 에덴은 전혀 무방비 상태였다. 사단의 꼬임에 따라 하와가 쳐다보게 된 금단의 과실을 실로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한’것이었다. 결국 아담도 넘어졌다.

 

사단은 똑같은 공격을 훗날 광야에서 또 시도하였다.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일을 시작하시려는 마지막 아담인 예수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는 예수께 돌로 떡을 만들어 허기진 육신을 채우라 했고, 높은 곳에서 당당히 뛰어내려 보라고 했으며, 온천하 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자기에게 절하라고 했었다. 그러나 말씀으로 무장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단은 완패하여 물러갔다. (마 4:1 ~ 11)

그렇다고, 사단의 도전이 영원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는 다양한 수법으로 - 본질은 여전히 동일하다 - 하나님의 성도들을 미혹하고 교회의 지도자들을 공격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는 사단의 타겟(target)으로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목사는 사단에 대해 교인들에게 가르치면서도, 자신의 생활 속에 스며드는 사단에 대해서는 아무런 방비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단의 역할은 귀신들린 자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목회자 자신이 사단의 공격에 대상이 되고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극복할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근신함이 평신도의 그것보다 배는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인식한 성도들은 목회자를 위한 기도를 쉬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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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역을 함에 있어서 부정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 비판적인 사람, 그리고 마주보기 싫은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밖에 없을 때도 있다. 어떤 교회는 목회자가 잘못된 신학으로 빗나가지 않도록 부지런히 설교를 기록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예배가 끝날 때마다 목회자를 찾아와 어떻게 하면 설교를 더 잘 할 수 있는지 설명하기도 한다.

최근에 한 목회자가 자신의 사역을 방해하는 어떤 교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 사람은 조심스럽게 다른 교인에게 접근하여 미끼를 던진다는 것이다

“저 말이예요. 우리 목사님이 꼭... 하셔야 하는지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이 꽤 많더라구요”

 

만약 이 말을 들은 교인이 자신은 목사님을 믿는다고 강력하게 말하면, 그는 얼른 자기가 한 말에 대해 뒤로 물러선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더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그 말로 인해 어떠한 위험도 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듣는 사람이 자기가 한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기만 하면, 그사람은 더 심한 불화가 일어나도록 과장해서 말하곤 한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 소문들을 수집하는데, 즉 이 사람 저 사람들에게서 불평 불만들을 모은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결국 문제를 일으켜 그 목회자로 하여금 사임하게 만드는 장본인이 된다는 얘기였다.

A. 루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