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요한 덫 - 밧세바 스캔들
교회가 작을수록 목회자는 여성신도들과 가까이 할 수 밖에 없다.
사단은 부부간의 사이가 원만치 못한 여자 성도, 남편이 장기 출타 한 여성도들을 적절히 충동하여 목회자의 올무로 사용한다. 그래서 근래에 들어 교회 지도자들이 가장 많이 걸려드는 덫이 바로 도덕적인 문제, 즉 윤리적인 문제인 것이다.
‘어느 교회 목사가 칠계를 범하여 그만 두었더라’는 식의 이야기는 결코 낯설지 않은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얷은 사실상 해묵은 기원을 가지고 있다. 이미 구약성경에서 그러한 사건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밧세바 스캔들’에 걸려든 성군 다윗의 참혹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삼하 11,12장)
“저녁 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곳에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한 여자의 나신 앞에서도 ‘다윗도’ 어쩔 수 없는 연약한 죄인이었다. 인간 - 어쩔 수 없는 죄인인 - 의 지성과 감성은 외모, 즉 보이는 것에 집착하고 그것으로 판단하게 된다. 다윗은 왕의 본분을 잊을 채 말초적인 자극에 모든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하나님 왕국을 건설해야 하는 숭고하고 원대한 뜻도, 지극히 사소하고 미묘한 감정 때문에 망각해 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누구든 한번 죄에 몰입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특히 이성적인 죄가 더욱 그러하다. 다윗의 간음이 살인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라! 결국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 나단의 직접적인 지적을 받기 전까지 자기가 행한 일을 ‘알지’ 못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다윗의 모습은 위엄있는 왕의 모습이 아니라 정욕에 사로잡힌 일개 탕아의 모습에 불과했다.
슬프게도 이러한 실패의 행렬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세기형의 ‘밧세바 스캔들’이 그리스도인들 속에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덫은 아무 때나 어느 곳에나 놓여져 있으며, 특히 목회자 앞에는 예측 불가능한 지점에까지 널려있다.
나는 신개발지역에서 의욕적으로 목회하여 지금은 커다란 교회를 이루고 시무하는 동료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그가 수년 전에 상가의 4층을 세내어 개척교회를 시작하고 있을 때, 자신이 사택이 비좁아 어쩔수 없이 교회의 한 귀퉁이를 막아 서재로 쓰고 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오전에는 혼자 서재에 앉아 설교 준비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교회에 등록한지 얼마 안 되는 여신도 한 사람이 상담을 하러 왔다. 그녀는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는 돌아갔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도 왔다. 거의 매일 그녀는 과일이며 음료수를 사들고 목사의 서재에 들어와 앉아 있다 가곤 했다.
늘 진지하게 말씀으로 권면하고 기도로 매듭지어 보내던 그도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여름이 되면서 그녀는 차츰 거의 맨살이 드러나는 옷들을 입고 오곤 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아무런 격의없는 사이인냥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까지 하였다. 급기야 어느날 그 젊은 목사는 어떤 형용할 수 없는 위기를 감지하고 밖으로 뛰쳐 나오고 말았다.
물론 그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친 요셉마냥 위기를 막아 냈지만, 뒷날 자신만이 아는 숱한 고비들을 넘겼다고 회고했다.
사실 이러한 류의 정서적 장애를 가진 여인들이 자신의 문제를 안고 목회자를 찾는 일은 결코 드문일이 아니다. 그들의 대화는 자신의 영적인 문제로까지 파급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건대, 위의 그 젊은 목사는 어떠한 의미에서 그러한 여인에 계속 접근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녀의 상담은 분명 의도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외롭고 마음 둘 데 없던 그 여인은 목회자의 ‘자상한 태도’에 어떤 가능성(?)을 놓고 환장에 젖어들었던 것이다.
이런 일도 있다. 한 교회의 젊은 여집사는 목회자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는 증세를 보였다. 그녀는 강대상에서 설교하는 목사를 바라보며 “얼마나 멋진 사람인가”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사모를 미워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것을 느낀 그 여집사의 남편이 서둘러 이사를 떠남으로 그 일은 매듭지어졌다.
이런 경우는, 목회자 자신도 모르게 강대상 아래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러나 의도적은 아닐지라도 여신도들의 무분별한 언행은 목회자에게 충분히 시험거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가 표면화 되었을 때에는 목회자 자신에게는 치명적 - 그것이 목회자 자신의 고의성이 있었든지, 없었든지간에 - 일 수 밖에 없다.
내가 아는 후배 목사는 천성적으로 사람이 붙임성이 높다. 그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여신도들의 팔을 잡고 어깨를 두드렸다. 때로는 속삭이듯이 “자매님, 하나님은 자매님을 사랑하십니다.”라고 위로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것이 그만 여신도들 간에 시기 싸움으로 번져져 그 목사는 결국 그 교회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는 목회자 자신의 외적인 단정한 몸가짐 - 속뿐만 아니라 - 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이 문제는 목회자 가정이 평소에 화목했는가와 깊이 연관된다. 다시 말해, 목회자 가정의 평안이 곧 교회의 평안이라는 말을 확증시킨다는 사실이다. 슬프게도 성적인 스캔들은 한번 번지기 시작하면 수습할 방도가 없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둘째 문제이다. 적당히 가감되면서 눈덩이처럼 커져 가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본인이나 누가 나서서 ‘내용은 이렇다’고 버선목 뒤집듯이 내보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이 문제가 생기면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그것이 어떤 죄이든 또 누가 범했든, 쉬 정죄하는 자리에 나서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단에게 지적받은 다윗이 회개할 때, 하나님도 노를 감하셨다. 다윗의 위대함은 사실 완전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됨을 즉시 시인하고 돌이킴에 있었다고 하겠다. 범죄가 인간의 일이라면 용서는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해서도 각자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타인에 관해서는 ‘긍휼히 여김’을 버려서는 안된다.
바울은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젊은 여자를 일절 깨긋함으로 자매에게 하듯하라”고 했다.
목회자에게 바로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 남녀 평신도들은 이 문제게 관해 자신의 목회자를 '보호'해 줄 수 있도록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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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눈이 여러분을 주시하며 여러분의 잘못을 관찰하고 있으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잘못은 세상으로 울려 퍼져나갑니다. 대낮에 하는 일식은 입증이 필요없습니다. 여러분은 교회의 빛이기 때문에 양떼들의 눈에 여러분 위에 머문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다른 사람은 드러나지 않게 범죄를 억제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이 큰 자비를 얼마나 감사하고 많은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보다 더 많은 도움을 받기 때문에 최소한 여러분의 범죄를 억제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이 큰 자비를 얼마나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는지요. 그들이 비록 악독한 마음으로 그렇게 할지라도 여러분에게는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뻔뻔스럽게 모든 사람 앞에서 범죄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또한 세상이 우리를 응시하고 있는데서 사악하게 범죄하는 것도 금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다른 사람이 응시하는 것을 기억하고 스스로 조심하는 것과 같이 여러분도 조심하여 일하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눈치 빠른 악의의 눈으로 모든 것을 가장 악하게 만들며 가장 작은 결점이라도 발견하여 더욱 악화시켜 폭로하며 결점이 없으면 결점을 만들려고까지 하는 악한 세상에서 여러분의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리차드 박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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