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수치
“여보 또 나왔어!”
뉴스를 보고 있던 내가 반사적으로 소리 지른다.
“뭐가요?”
아내는 주방에서 서둘러 나온다.
“...또 목사가 뭐 어쨌다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군포. 거기 한 교회의 모 목사가 15세 여학생을 성추행했다고 한다.
유난스레 성폭행에 관한 사건이 빈발하는 요즈음, 조마조마했던 바 드디어...
얼마 전부터 TV, 뉴스를 시청할 때에는 예민해짐을 느낀다.
어떤 비리 사건이 보도될 때에는 그가 교인이 아니기를 어떤 부끄러운 일이 발생 했을 때 그가 교회의 목사가 아니기를 바라며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볼 때 우리가 가질 자세는 두가지이다.
하나는 그럼에도 우리는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위조지폐가 나왔다고 해서 모든 지폐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상식 이하의 목사가 나타났다고 해서 모든 목회자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자신의 반듯한 삶과 우리 사회의 더 나이짐을 기대하며 고뇌하며 살아가는 숨겨진 목회자들이 더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로나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마치 속성 코스 마냥 ‘목사’를 찍어내는 부실 신학교들이 존재한다. 거기서 신앙적 인격적 학문적 자질이 미달인 이들에게 목사 안수가 자행되고, 특히 오늘날은 그렇게 여목사들이 대거 탄생하고 있다.
아! 이 혼란스러운 일은 주님 오시기까지 해결될 길이 없다.
또 하나는 나도 조심해야 한다는 각성이다.
누구도 온전치 않다.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특히 인간의 본능의 일탈에 관한 한 인간은 누구도 견고하지 않다. 범죄 할 여건과 환경이 조성되면 누구도 넘어질 수 있다.
애굽 땅에 간 요셉 청년 같은 사례는 극히 드문 경우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근신하며 기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무사히 40대를 넘겼다’고 자조하던 동료 목사를 기억한다. 이제 비교적 성적 충동으로부터 안전한(?) 나이에 들어왔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보라. 그 범죄자는 60세가 넘은 자였다. 60이 넘어도 넘어진다!
누구도 넘어진다는 사실을 자기 핑계로 삼지는 말자. 다윗도 범죄 했다는 말은 그러니 나도 괜찮다는 말이 아니다. 누구든 자기의 범죄에 대해서는 각자가 그 대가를 치루게 된다. 이 사실을 잊지 말자.
오늘이라는 시간... 우리는 누가 어쨌다는 말에 쉬 흥분하고 쉬 돌을 집어 든다.
그러나 그러한 시간에 할 일은 바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다.
아! 주님의 은혜 아니면 누구도 이 세상의 조류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재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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