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비 문제
목회자가 강단에서 가장 언급하기 껄끄러운 부분이 바로 헌금에 관한 얘기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목회자에게 당혹스러운 것은 자신의 사례비에 대해서 말해야 할 때이다.
교회마다 연말이 되면 새해 예산을 세우는데, 이때는 목회자의 갈등이 심화되는 계절일 수 있다.
예산 위원들로부터 목회자 사례비한 대한 시비가 있었다는 소식이 들어오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이때가 되면 삯군으로 취급데는 것같아 목회자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바울처럼 자비량 전도자가 되고 싶은 충동도 가져본다. 목회자라고 광야의 만나를 먹고 살 수는 없다. 목회자도 먹고 입어야 하며 가족을 부양하고 자녀를 가르쳐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자에게도 돈이 필요하다.
통상 목회자에게 나가는 급료는 월급이라 하지 않고 ‘사례비’라고 부른다. 이는 따로 생업을 갖지 않은 목회자가 자신의 생계를 염려하지 않고 목양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매월 미리 그달분의 생활비를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급여를 받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떳떳하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바울 사도도 일꾼이 삯을 받는 것이 결코 나쁘지 않다고 가르치면서도 자신은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죽을지언정’ 자신의 그 자랑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했다.(고전 : 9:15)
칠순을 바라보면서 같은 면내의 무교회 지역 골짜기에 들어가 두 번째 교회를 개척하시던 나의 아버지는 혹간 찾아가는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곤 하였다. “하나님이 주시면 먹고 안 주시면 안 먹는 것이 목회자이지.” 그런데도 사실 그 분은 누군가 어김없이 갖다놓고 가는 쌀부대를 통해 한 번도 끼니를 거르지 않으셨다고 했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상황에서는 모든 목회자가 바울처럼 자비량으로 목회할 수 없고 초대교회처럼 성도들의 비정기적 현물로 생활 할 수도 없다.
오히려 교회는, 목회자가 개인과 가정생활에 있어서 돈 때문에 시간과 관심을 쓰지 않아도 되도록 충분한 사례를 드리는 것이 현명하고 옳다.
그렇다면 목회자의 사례는 어느 정도라야 하는가? 결코 간단치 않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극단적인 사소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청빈 = 거룩’ 이라는 관념이다. 목회자는 가난할수록 더 거룩하고 더 바른 목회자라는 사고도식이다.
나는 수년전에 커다란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한 장로님의 집무실에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의 논조는 현대교회의 변질이 목회자의 변질 때문이며, 목회자의 변질은 목회자들이 배가 불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 주장이 억지만은 아니다. 아니 엄청난 진실을 간직하고 있다고도 보겠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것을 주장하는 자신은 외제차를 타고, 자신의 거실에 바꾸어놓을 더 고급스런 쇼파를 팢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천주교의 신부들처럼 혼자 사는 것도 아니고, 이미 가족을 거느린 우리들의 목회자는 교회의 목사이기 이전에, 한 가족의 가장임도 잊어서는 안된다.
목회자의 사생활은 할 수 있는한 검소하고 청빈한 것이 좋겠다. 그러나, 그것은 그 목회자의 내적인 자세이어야지 이쪽에서 강변할 성격은 못된다. 더구나 그의 가족과 자녀들에게까지 궁핍하기를 요청한다는 것은 분명 지나친 일이다. 그래서 결국 사모가 직업 전선에 뛰어드는 교회가 있다.
전에 총회 사무실에서 근무할 때, 번역을 돕기 위해 한 자매가 들어왔다. *대 대학원을 나온 자그마한 체구에 다부진 자매였다. 대화중에 그가 목사의 딸로서 자랐으며, 이럭저럭 알만한 선배 목사의 자제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고지식하게 서울에서 떠나 시골로 들어갔다는 자기 부친의 예를 들면서, 왜 자기 형제들이 그토록 피나는 고생을 해야 하는지 이해를 할수 없다고 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적어도 그녀가 자신의 아버지를 미움의 대상이요 단지 무능한 사람, 그 이상으로 생각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가난 - 그것이 목회자 자신에게는 긍지와 기쁨이 될 수 있을지 몰라고, 그의 가족들에게는 고통, 그 이상의 의미밖에 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
오래 전부터 내가 아는 한 분 농촌 목회자의 두 딸은 학업을 중단하고 공장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목회자에게 강요된 가난, 초라한 궁핍은 오히려 설교준비와 기도생활 등 목회행보에 지장을 초래하는 장애물 일 수밖에 없다.
또 하나의 반대적인 사고는 목회자의 사례비는 할 수 있는 한 많은 액수로 책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헌금생활에 있어서도 가장 앞장서서 모본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주변에 풍부하게 나누어 주고 베풀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주로 일부 목회자 쪽의 얘기라면, 평신도들 입장에서는 목사가 넓은 집에 살고 또 잘 살아야 자신들이 부담이 없다는 것이다. 목사가 부자이어야 성도들이 우러러보지 어디 꾀죄죄해서야 무슨 덕이 되겠느냐고도 한다.
사실, 돈이란 대단하다. 주머니에 단돈 1000원 뿐인 사람과 수표가 점잖게 들어있는 지갑을 지닌 사람은 그 걸음걸이부터가 다르다. 어쩐지 여유만만하고 세련되어 보인다. 심지어는 목회자의 사이에서도 때로는 사례비 액수가 많은 이가 기를 펴고 고급승용차를 소유한 목회자가 성공한 목회자로 치부되기도 한다.
최근에 한 교회의 부교역자 청빙 광고에는 그 자격조건으로 ‘자기집에서 출퇴근이 가능한 자’를 내걸었다. 목하, 목회자도 자기 집을 소유해야 하는 시대로 들어가는가 싶다. 어떤 면에서 목회자도 자기집 한 채는 있어야 일단 유사시(?)에 안전할 수도 있고, 또 그래야 더 담대히 목회할 수 있다고 가르쳐주는 이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쪽의 모든 주장들은 원초적인 것이라기보다 현상적인 것들이라 볼 수 있다. 나의 6형제 중에서 목사인 나만이 자기 집이 없는 처지이지만 여전히 다급하고 싶지 않다.
성경은 여전히 우리를 향해 “너의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마 6:20)고 말하고 있으며, 또 목회자는 이런 사상을 외쳐야 되는 사람들이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 6:21)고 책망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더구나 ‘재물의 부요 = 하나님의 축복’ 이라는 등식에 분명한 성격적 제동을 걸어야 되는 사람들이다. 오히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이며 (딤전 6:10),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행 20:35)고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
많은 목회자들이 매우 물리치기 어려운 유혹은 교인들이 지나치게 사치한 물건, 비싼 물건을 선사할 때이다. 지니기에 부담스러운 물건들은 차라리 목회자의 영적능력과 영향력에 암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만일 돈을 탐내고 사치한 생활을 즐기는 목회자가 있다면 그는 이미 목회가 아닌 사업을 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 땅의 대부분의 영적인 지도자들은 검소한 삶을 지향하며 자신의 가르침과 일관성 있는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렇게 목회자 사례비의 액수에 대한 양극단을 지양하고 나면, 남은 것은 자명하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고전 14:40)하는 것이다. 목회자의 경제 생활에는 중용의 도가 필요하고 또 우리는 그것을 도와야 한다.
일반적인 개념에서 목회자의 사례비 액수는- 그 교회 교인들의 평균 소득과 비슷하다거나 그보다 조금만 높게 책정되면 된다고 본다.
고인이 된 옥한흠 목사도 어느 세미나에서 그렇게 말한 것을 기억한다.
목회자의 생활수준은 보통 중간층 교인들의 그것과 흡사한 것이 좋겠다. 이는 가난한 교인이나 부유한 교인이나 모두를 이해하며 목회자 자신의 삶에서 돈이 ‘아픔’이 되거나 올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동시에 도려해야 할 것은 같은 교회에서 담임목사와 다른 교역자들, 혹은 사찰이나 기사와의 차이가 지나치게 나지 않도록 적절한 배려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그것은 교회와 교회, 목회자와 목회자간의 ‘상대적 빈곤감’이다. 목회자 끼리의 만남의 자리에서도 “얼마받소?” “몇 개월이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적지 않다. 이것은 곧 바로 그 목회자의 능력(?)의 바로미터(barometer)가 된다.
한 도시 안에서 그 격차란 실로 상상을 뛰어 넘는다. 현 자본주의의 가장 큰 병폐인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교회에도, 목회자의 생활양태에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큰 승용차를 산 한 목사님은 교회 앞에 세워둔 자신의 차를 만지는 동네 아이에게 사정없이 손지검을 했다. ‘한 영혼’을 찾아 먼 길을 떠나시는 목자장 예수의 모습은 상실된 지 오래이다.
이처럼 일부 - 이는 분명 극소수라고 말하고 싶다 - 과소비형 목회자들은 한번 외식하는데 수십 만원씩 거침없이 써버리고, 호텔부페, 사우나, 헬스클럽, 골프장 등에 낯익은 고객이 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그 곁에는 오직 ‘목회는 천직’이라는 소명의식 하나만을 붙들고 빤한 사례비를 쪼개고 쪼개는 목회자들도 있다.
더 심각한 꼴은 도시 목회자와 농어촌 목회자의 격차이다.
예장 총회 농어촌부의 자료(1989년)에 따르면 농어촌 목회자들의 주된 이동사유가 사례비 - 경제난으로 47.8%, 자녀 교육문제로 16% -에서 비롯된다고 밝히고 있다. 수많은 미자립 교회의 문제는 기본생활비도 태부족인 목회자의 사례비인 것이다.
오는날 선교사로 나가는 사람이나 나갔다가 들어오는 사람들은 종종 박수도 받고 환영도 받는다.
그러나 우리 국내에서 낙도나 오지에 들어가는 자에게는 별로 관심을 갖거나 위로하고 격려하는 이가 없다. 서울의 서점에 들렀다가눈물만 흘리고 되돌아 갔다는 낙도 목회자의 이야기가 우리의 가슴을 친다.
이 상대적 빈곤감은 그대로 목회자의 자기 존중감에 상처를 주기도 한다. 거교회적인 노력, 교단차원의 정책, 이런 것들이 없이는 결코 이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목회자가 재물에 신경쓰지 않고 청빈하게 살아야 하여, 남들에게 윤리적인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대 명제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길이요, 사도 바울이 보여준 모본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런 마음만으로 다 해결할 수 없는 현실적 문제들이 목회자의 실생활 속에 산재해 있다. 그래서 혹자는 돈과 목회자와의 관계를 여인과 화장에 비유했다. 분을 너무 많이 바르면 지나쳐 보기에 흉하고, 너무 적게 바르면 초라해지는 것처럼 목회자와 돈은 그런 관계에 있다고 하겠다.
진실로 맘몬이즘 (mamonism)의 위력이 극대화되어가는 이 시대에 목회자는 돈 문제에 대해서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하리라
어쩄든,
저가 뉘기에 이 시대의 황금 우상 앞에서도 굽힘이 없는가? -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 목회의 길을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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